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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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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53) 황강 1- 덕유산:황강의 발원지~거창군 북상면

덕유산서 솟은 샘물은 삿갓골 타고 황강 물줄기로…

  • 기사입력 : 2010-05-2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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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강의 발원지 덕유산 삿갓골.

    황강의 발원지를 찾아가는 5월은 자연이 주는 생명의 용틀임과 형형색색 화려한 꽃들이 시샘을 하듯이 활짝 피어 있었다. 강은 수많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물줄기가 모여 큰 강을 이룬다. 강의 발원지를 찾아나서는 길에는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들 그리고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줄거움이 있다.

    ◇ 삿갓골·황점

    황강의 발원지를 찾아가는 길에 2007년 4월 남강의 발원지를 답사할 때 인연을 맺었던 남덕유산 아래 조산마을에 사는 표경대(77)씨를 찾았다.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건강한 모습으로 나무로 공예품을 만들며 농사를 짓고 욕심 없는 농부로 자연 속에서 살고 있었다.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며 아껴 두었던 고로쇠물을 따라 주며 하루쯤 쉬어가라고 했다.

    늘 쫓기듯 사는 일상이라 사양을 하고 남덕유산과 월봉산을 가르는 남령을 넘으니 황점마을이 반겨주었다. 황점마을에서 삿갓샘이 있는 대피소까지는 10리가 조금 넘는다. 마을 입구에서 쉼터바위까지 2.42km이고 다시 마지막 계곡까지 0.97km이다. 계곡에서 삿갓재 대피소까지는 0.81km이니 동절기에는 오후 4시 이후에는 산행을 통제한다고 나무판에 운치 있게 새겨 놓았다.

    젊은 시절이라면 늦은 시간이지만 과욕을 부려 다녀오겠지만 해가 저물어 중간에서 하산을 했다. 덕유산 삿갓봉(해발 1400m) 부근 삿갓샘에서 시작된 황강의 물줄기는 굽이굽이 삿갓골을 타고 내려가며 작은 폭포를 만들고 맑은 물줄기를 시원스럽게 흘리며 깨밭골과 만나게 된다.

    삿갓봉은 덕유산 다섯 봉우리 중에서 가장 낮은 봉우리이다. 빛바랜 앨범을 뒤져 보니 1994년 12월 18일 덕유산 향적봉에서 주능선을 따라 일행들과 삿갓봉을 지나갔던 기억이 새로웠다.

    여름이면 사람들로 붐볐을 황점마을에는 텅빈 버스만 다녀갈 뿐 산골 마을의 한가로움이 가득하였다. 시원한 계곡을 찾아온 피서객 차량들로 붐볐을 주차장도 비어 있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북상 13경이 지도로 제작돼 부착되어 있었고 부근에는 검은 오석으로 새겨 놓은 효행비가 눈길을 끌었다. 마을 도로변에 의사 박공삼형제 항일사적비가 세워져 있었고 비석에 새겨진 후손의 추모시가 잠시 발길을 머물게 한다.

    갈계리 삼층석탑

    송계산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풍경.

    ◇ 갈계리 삼층석탑·송계사

    황점에서 여러 계곡 물이 모여 월성천으로 이름을 바꾼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면 거대한 바위의 형상이 인위적으로 쌓은 돌탑처럼 4개의 층으로 되어 있는 사선대를 만난다.

    거창군지에 의하면 1909년 10월 고종 황제의 둘째 아들 의친왕 이강이 일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 위천에 사는 승지를 지낸 정태균의 집에 한 달간 머물렀다. 이곳에 의병기지를 만드려고 막사 터와 훈련장을 마련하기 위해 일부 땅을 매수하다가 탄로되어 일본 헌병에 의해 서울로 호송되었다.

    사선대의 뜻에는 임금의 집안을 기린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물이 흐르는 계곡에는 넓은 바위가 펼쳐져 있고 바위 사이에 촛불을 켜놓은 흔적들이 민간신앙의 장소였던 것 같았다.

    거창군 북상면사무소 방향으로 내려서면 농산리 673번지에 모리재라고 하는 재실이 있다. 정온 선생은 1637년 인조왕이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는 화의를 하자 남한산성에서 자결을 시도했으나 광주목사의 손에 구명된 후 낙향해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은거했다.

    ◇ 갈계리 임씨고가·서간소루

    논에는 입하를 지나면서 못자리 준비를 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북상면 소재지에서 1001번 지방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고가들이 보인다.

    갈계리 임씨고가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효자로 이름이 높았던 갈천 임훈(1500~1584)의 옛집이다. 1555년(명종 10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이곳에서 80세가 넘은 아버지를 모시며 살았다고 한다.

    이 집은 솟을삼문을 한 대문채, 사랑채, 안채가 각각 독립적인 一자형 건물을 이뤄, 전체적으로 ‘三’자형으로 배치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경남 지방의 옛 주택에서 자주 나타나는 독특한 방식이다.

    임씨고가는 홍살 정려문과 그 문의 기둥을 떠받친 거북 모양의 주춧돌이 매우 특이하다. 서쪽 담장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집은 임운(1517~1572)이 살던 곳이다. 서간소루는 서간 임승신이 학문과 덕행을 닦던 곳이다. 이곳 갈계리 일대는 임씨의 동족마을로, 서간소루는 마을의 종가격인 임씨 고택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서간소루는 대문채와 사랑채만으로 이루어진 특징을 보이는데, 살림채가 없는 것으로 보아 본래 임씨 고택과 같은 울타리 안에 있던 주거공간의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선대

    모리재

    ◇ 사선대·모리재

    길게만 느껴질 것 같은 봄날의 하루도 점심을 놓치며 답사를 했지만 짧기만 했다. 여행은 늘 여유가 있어야 하고 유유자적하는 마음이라야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따가운 햇볕이 내리는 임씨고가를 나와 송계사 방향으로 나오면 탑불 마을로부터 약 200m쯤 떨어진 도로변 옛 절터에 갈계리 삼층석탑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폐사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경작지로 변해 절의 흔적을 찾기도 어려웠다. 절의 내력을 전해주는 사료가 없어 지역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다. 이 탑은 사각형으로 된 이중의 받침대를 두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일반 석탑 양식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간략화된 기법이 고려시대 이후의 변화 양상을 잘 보여 주기도 한다. 탑의 각 몸체에 모서리 기둥을 조각했을 뿐, 그 밖에 별다른 조각은 없었다.

    시골길의 한가로움을 따라 송계사로 향했다. 거창군 북상면 소정리 깊은 골짜기에 있는 송계사는 절보다 계곡이 아름다워 피서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앞에서부터 이어지는 숲길은 예전에 등산을 하면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길이다. 계곡을 따라 산길로 가면 덕유산 향적봉으로 가는 이십 리 길이다.

    송계사는 원효와 의상이 652년(진덕여왕 6년) 영취사를 창건한 뒤 5개의 부속 암자를 세우면서 송계암이라고 이름 지어 창건했다고 한다. 그 후 많은 고승들이 이 절에서 배출되었다. 포근한 흙마당이 있는 절 입구에 석종형 부도 2기가 있었다. 송계사는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뒤 폐허로 있다가 숙종 때 진명이 송계암을 중건했다. 6·25전쟁 때 다시 전소된 것을 1969년 중창했다.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대웅전, 종각·공사 중인 요사채 등이 있다.

    지난 5월 3일 화재가 발생해 소실된 진주 성전암에 20년 동안 머물렀던 주지 반야스님과 총무 무예스님, 공양주 보살까지 송계사에 있었다. 무예스님은 얼마나 검소한지 성전암에 있을 때 수박 껍질을 얇은 부분만 깎아 내고 드셨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스님과 녹차를 앞에 놓고 지나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덕유산 자락으로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행복한 망중한이었다.

    ☞여행 TIP-맛집

    남덕유산 대표 산나물집(박영점): 산나물정식, 산나물비빔밥, 한방백숙, 메밀파전, 옻닭.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1710-5. ☏ 055)944-5351. 깊은 산속에서 채취한 자연의 산나물, 야채 등을 이용한 청정한 재료로 건강식을 제공하고 있다.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와 여유를 누릴 수 있다.

    (마산제일고등학교 학생부장·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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