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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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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풍수지리] 잊혀가는 함라마을 삼 부잣집

  • 기사입력 : 2023-10-06 08: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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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전라북도 익산시 서부면 함라면(咸羅面)에 ‘함라마을 삼 부잣집’이라 불리는 조해영 가옥(전라북도민속문화재), 김병순 가옥(국가민속문화재), 이배원 가옥(전라북도민속문화재)이 있다. ‘함라’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함열현의 별호인 ‘함라’에서 유래했다. 삼 부잣집의 주산(뒷산)인 함라산의 산줄기는 장안산, 팔공산, 마이산을 거쳐 완주 주화산까지 이어진다. ‘함라’의 사전적 뜻은 ‘모두를 감싸다’는 의미이며, 풍수적 뜻은 ‘그물을 펼친 듯한 산’으로 ‘병풍산’을 의미한다. 병풍을 펼친 것 같은 함라산 덕분에 삼 부잣집은 겨울철에 불어오는 한랭한 북서풍을 바로 맞지 않으므로 온화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함라마을의 옛 담장은 주택의 규모에 비해 상당히 높다. 이것은 풍수를 고려하기보다 사생활 보호에 더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담장의 높이는 1.5m 정도여야 생기를 보존하면서 공기의 소통도 잘 이루어지는데, 2m 정도 되는 옛 담장은 소통부재와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건축한 주택임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토석담인 함라마을의 담장 하부는 사춤공사(틈을 진흙으로 메우는 일)를 하지 않고, 자연석을 메쌓기(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석재만으로 쌓는 것) 방식으로 쌓았다. 이는 도로보다 높은 마당의 빗물을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담장 하부를 통해 밖으로 내보내 음기(陰氣)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마을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가옥이 조해영 가옥이다. 조해영의 선조들은 예부터 함라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조씨 집안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조해영의 고조부인 조한기인데, 고종 때 사천군수와 정읍군수를 역임했으며, 조해영의 아버지인 조용규가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1918년 조해영 가옥을 건립했다. 현재는 사랑채와 별채, 행랑채, 문간채만 남아있다. 문간채를 들어서면 ‘ㄴ’자 형으로 된 내외담(시선차단담)을 만나는데,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설치해 안채의 내밀한 공간을 보호하도록 했다. 바람벽의 기능도 하는 ‘ㄴ’자 형태의 담장은 일반적인 살림집의 담장이 아니라 궁궐에서나 볼 수 있으며 학, 사슴, 소나무, 구름 등 십장생이 새겨져 있어 가옥의 위엄과 운치를 더하고 있다. 그러나 조해영 가옥은 산비탈의 연장선상에 있어 생기가 응집되지 않은 무득무해(無得無害·보통의 터)한 곳이다. 또한 사랑채가 함라산의 지맥(地脈·땅속의 정기가 이어진 지점)에 역행(逆行)한 서향집인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 행랑채는 1930년에 건립한 김병순 가옥은 일제강점기 전통적인 상류가옥의 형태를 보여주는데, 양반가옥 형식을 근간으로 하여 구조와 의장에 일본식 수법이 가미됐다. 사랑채 옆에는 세면대가 딸린 화장실을, 행랑채 끝에는 목욕탕을 두었으며, 대청은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 형식으로 아자(亞字) 난간을 둘렀다. 지맥에 순행(順行)한 남향에 가까운 집이지만 뒤쪽 집들을 사들여 점차 넓힌 탓에 건물 전체가 대문 가까이에 배치된 점이 아쉽다. 대문을 들어설 때 공간적인 여유를 넉넉히 두면서 사랑채가 있고, 터의 가장 안쪽에 안채와 부속건물이 배치됐다면 생기가 응집된 자리에 사람이 머물렀을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 마당이 있고, 담장에 설치한 두 개의 중문을 통해 안채와 사랑채로 들어간다.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나란히 배치하면서 그사이에 꽃담장(내담장)을 두어 남녀의 영역을 분리함과 동시에 안주인의 공간을 보호했다. 각각의 방문은 두 겹 또는 세 겹으로 돼 있어 열기와 냉기 및 소음을 차단시켰다. 김병순 가옥은 살기(殺氣)는 차단시키고, 생기는 공유하는 구조이다.

    1917년에 지은 이배원 가옥은 세 부잣집 중에서 가장 먼저 건립했으나 사랑채를 원불교에서 매입해 함라교당으로 사용하는 등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많이 손실한 점이 안타깝다. 마을 사정에 밝은 노인의 말로는 이승만 정권 때 토지개혁을 하면서 삼 부잣집의 토지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세 부잣집은 노력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보통의 터’이다.

    (사주명리·수맥·작명연구원 055-297-3882)

    (E-mail : ju46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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