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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김해 도자의 중심, 묵방리 도요지- 김재홍(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조사부 팀장)

  • 기사입력 : 2023-11-16 19: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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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 상동면의 대감리와 묵방리는 사기점골의 계곡을 사이에 두고 경계가 나뉘는데, 조선시대는 상동이라는 하나의 면으로 묵방리는 먹을 만들었던 곳이라 하여 ‘먹방’ 또는 ‘묵방’이라고 불렸다. 묵방리 내에는 대략 3개소의 가마터가 입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묵방리 10번지 백자가마터는 금년 11월 발굴조사가 마무리되었고 묵방리 30번지 백자가마터는 2019년 11월 발굴 조사되었다. 상동 분청사기 가마터가 폐기되었으나 도자기를 만들던 전통은 계승되어 임진왜란과 정묘재란이 끝나고 묵방리 10번지 백자가마터에서 식생활 용기와 다양한 도구를 제작하였고 다음으로 이전 칼럼에서 자세히 설명했던 상동 백자가마터로 이동하여 백자와 철화백자를 제작한 뒤 마지막으로 묵방리 30번지 백자가마터로 이동하여 백자를 제작하였다. 모든 백자가마터에서는 민수용의 식생활 용기가 주로 제작되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정형화된 그릇이 만들어지며 이러한 현상은 민간에서도 그릇의 용도에 따라 밥상을 차리는 첩수가 자리 잡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묵방리 10번지 백자가마터와 30번지 백자가마터는 각각 약 2만여 점의 백자가 출토되었다. 묵방리 10번지 백자가마터에서는 접시를 많이 생산하였는데, 잘 만든 접시는 가볍고 얇아서 지금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이다. 반면 묵방리 30번지 백자가마터에서 제작된 백자는 밥그릇에 해당하는 ‘발’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높이가 15~18㎝로 크고 무거운 편이다. 과연 여기에 밥을 먹었을까 생각할 정도로 크지만 조선시대 말 그림 및 사진 자료를 보면 확실히 밥그릇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번지와 30번지 백자가마터는 약 100년의 시간차를 가지고 있는데, 100년의 시간 동안 당시 사람들이 어떤 그릇을 필요로 했는지, 어떤 용도로 그릇을 사용하였는지를 알 수 있으며 당시 식습관과 음식문화가 어떤지를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밥, 국, 반찬을 먹는 우리의 식습관은 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고, 그릇의 형태는 조금씩 달라져도 동일한 문화 속에서 밥그릇, 국그릇, 접시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는 점을 발굴조사를 통해 재확인할 수 있었다.

    김재홍(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조사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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