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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우리 교가가 친일잔재라고?- 원은희(시인·성재일기간행위원회 회장)

  • 기사입력 : 2023-11-29 19:3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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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팬데믹으로 수년간 멈췄던 모임이나 행사가 연말을 앞두고 부활 중이다. 그 분위기에 얹혀 고교 동창 모임엘 갔다. 각 기수별 번호가 꽂힌 테이블에 앉아 모처럼 여유를 가졌다. 관례에 따른 식순이 끝나고 서로의 연대감, 동질감을 상기하듯 교가 제창이 이어졌다. 까맣게 잊어버린 교가를 연습이라도 해온 듯 힘차게 부르는 동문들을 경이롭게 지켜봤다.

    같은 테이블에 동석한 후배는 올해 교장에 취임했다. 왜소하고 내성적인 성격과는 달리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모교 출신 교장이 되었으니 동문들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개교 이후 수십 년간 부르는 저 교가를 만든 이가 친일 인사인 줄 알았냐고. 지금껏 별다른 관심도 없었으니 당연히 몰랐다. 얘기인즉슨 교목, 교화, 교가 등 학교 내의 일제 잔재를 개선할 요량으로 각 교육청이 전수 조사를 했는데 우리 교가가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교장에 취임하자마자 이런 부담감을 떠안게 된 후배가 짠했다. 친일 잔재를 학생들에게 대물림할 수도, 명분에 맞는 교가로 당장 교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련의 논의 과정을 거쳐 작사와 작곡은 물론 음원에 이르기까지 재원은 물론 수고로움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는 단순한 배일의 차원을 넘어 배움의 현장에 뿌리내린 정신적 식민주의를 넘어서기 위함이니 어쩌랴.

    교가는 동창회 때나 부르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학교의 건학 이념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교육적 의미를 담고 있다. 올바르게 가르치고 배우겠다는 다짐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교가가 친일 잔재라고? 이참에 교가를 새로 만들 명분이 생겼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어떤 어휘, 어떤 문장을 쓰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은 물론 사회의 품격과 삶의 질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음악도 또한 그렇다. 기억을 잃으면 다 잃는다. 치욕과 아픔의 역사는 더욱 그렇다. 견고한 기존의 질서도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깨지기를 반복하며 거듭나야 한다. 창조의 두려움을 넘어서야만 한다. 교가도 마찬가지다.

    원은희(시인·성재일기간행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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