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년幼年 - 김바다 생각하는 사람이 청동 어깨를 빌려주었다뺨을 기대고 같이 텅 빈 운동장을 내려다보면담 너머 세병관洗兵館이 보였다아무도 몰래세병관洗兵館 흙바닥을 파보고 싶었다거대한 창과 칼이 묻혀 있다고 들었기에유년幼年의 한낮매미처럼 브론즈에 붙어챙챙 쇠붙이 소리...2015-11-05 07:00:00
- 금정산 바람 되어- 김정자
산 그림자처럼 서늘히 생명의 통증을 가셔주던오욕의 인생 천사의 삶이라 보듬어 주던그대 지금 어디서 살고 있나요금정산 꼭대기 바람 되어해와 달 노래하며 떠돌고 있나요들녘은 소리 없이 저무는데‘무지개 저 너머’ 세상 그리워서둘러 먼길 떠난 맑은 혼이여새록새록 보고 싶은 눈물 도는 하늘가여☞ 벽돌로 반듯...2015-10-29 07:00:00
- 그 꽃다발- 정현종
마추픽추 산정山頂 갔다 오는 길에무슨 일인지 기차가 산중에서한참 서 있었습니다.나는 내렸습니다.너덧 살 되었는지(저렇게 작은 사람이 있다니!)잉카의 소녀 하나가저녁 어스름 속에 서 있었습니다.항상 씨앗의 숨소리가 들리는어스름 속에,저 견딜 수 없는 박명 속에,꽃다발을 들고, 붙박인 듯이.나는 가까이 가...2015-10-22 07:00:00
- 인디언 전사처럼- 정끝별
말은 달리다 숨이 차면 제 목을 물어뜯어끓는 피들을 풀어놓는다지숨차게 달리는 말 잔등에 재빨리 올라칼날처럼 바람을 가르며저 거친 벌판을고삐도 재갈도 안장도 다 내던지고바람조차 눈치채지 못하게편자도 말머리도 마침내는말꼬리도 없이 달려봤으면머리에는 새털을 꽂고얼굴에는 바람 자국을 새기고말 뱃가...2015-10-15 07:00:00
- 돌- 이재무
모름지기 시인이란 연민할 것을연민할 줄 알아야 한다과장된 엄살과 비명으로 가득 찬페이지를 덮고새벽 세 시 어둠이 소복이 쌓인적막의 거리 걷는다 잠 달아난 눈 침침하다산다는 일의 수고를 접고살 밖으로 아우성치던 피의욕망을 재우고 지금은 다만,순한 짐승으로 돌아가 고른 숨소리가평화로운 내 정다운 이...2015-10-08 07:00:00
- 시인 지렁이 씨- 김소연
가늘고 게으른 비가 오래도록 온다숨어 있던 지렁이 씨 몇몇이 기어나왔다꿈틀꿈틀 상처를 진흙탕에 부벼댄다파문이 인다시커멓고 넓적한 우주에서이 지구는 수박씨보다 작고,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지렁이 씨의 꿈틀거림도 파문을 만든다광활한 우주를 지름길로 떠돌다 돌아온 빗방울에는한세상 무지렁이처럼 살다 ...2015-10-01 07:00:00
- 시·5 - 나태주
산문은 100사람에게한 번씩 읽히는 문장이고시는 한 사람에게 100번씩읽히는 문장이라는데어쩔 거냐?시가 나에게 묻는다☞ 사람에게 가장 좋은 섬김은 ‘말’이 아닐까요? 선물이나 뇌물처럼 부담을 안아야 하는 것도, 부채의식을 짐 져야 하는 것도 아닌, 스스로와 상대에게 가장 선한 모심은 참으로 말, 그것이지 않...2015-09-24 07:00:00
- 무릎 꿇는다는 것- 김일태
밭고랑에 둥글게 허리를 말아평생을 무릎걸음으로 호미질 하던 어머니몸 세워 건성건성 일하는 내게 이르셨지사람이 무릎을 세우면땅이 호미 날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힘만 더 든다고시름시름 얘기 나누면서맨살로 궁굴어야 한다고가을바람에 무릎 꿇고 허리를 낮춘 쇠비름 노란 꽃그 꽃 한 송이를온몸으로 꽉 ...2015-09-17 07:00:00
- 먼 왕십리- 권달웅
1964년 초겨울 역마다 서는 완행열차는 경상북도 봉화에서 청량리까지 아홉 시간이나 걸렸다. 어머니가 고추장항아리 쌀 한 말을 이고 내린 보퉁이에는 큰 장닭 한 마리가 대가리를 내밀고 있었다.나는 어머니와 이십오 원 하는 전차를 탔다. 사람들은 맨드라미처럼 새빨간 닭 볏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았다. 나는 ...2015-09-10 07:00:00
- 아버지의 짐- 김혜연
젖병 물리면서 다 크도록 키운 개가 없어졌다도둑으로부터 주인 집 지켜내야 했던버겁고 힘든 시간 가볍게 털어버리고복날 하루 앞둔 저녁 무렵짖지도 않고 사라졌다도둑맞아 벌써 어느 놈 뱃속에 들어갔는지혀 끌끌 차며 대문 밖 나가시다 하는 아버지의 혼잣말그 놈 제 발로 걸어 나갔다면 잘 나갔다버리지 못하...2015-09-03 07:00:00
- 추석 무렵- 성선경
들판의 벼 이삭들이 칙칙 밥 익는 냄새를 풍길 때가을, 달의 늑골 사이에도 살찌는 소리가 들립니다.책장과 책장 사이구와 절 사이지난여름 내내 압핀에 꽂혀 있던검은 귀뚜라미들도 귀향 귀향문득 잠에서 깬 듯 웁니다.나는 그만 단풍 같은 책장 덮고 어머니 하고 불러 봅니다.칙칙 김을 내뿜는 압력밥솥같이 둥그...2015-08-27 07:00:00
- 자존- 윤효
무서리 하늘 높이 기러기 행렬이 지나고 있었습니다.때마침 헬기가 굉음을 내며 스쳐갔으나, 그 대오를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았습니다.☞ 겨울을 찾아 나고 드는 철새의 행렬과 괴력에 가까운 힘을 가진 헬기의 비행이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 상태. 여기서 ‘그 대오를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은 주체는 기러기 자신들...2015-08-20 07:00:00
- 동질(同質)- 조은
이른 아침 문자 메시지가 온다- 나 지금 입사시험 보러 가. 잘 보라고 해줘. 너의 그 말이 필요해.모르는 사람이다다시 봐도 모르는 사람이다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순간지하철 안에서 전화를 밧줄처럼 잡고 있는추레한 젊은이가 보인다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그때 나는 잡을 것이 없었고잡고 싶은 것도 없었다그 긴장...2015-08-13 07:00:00
- 가족- 윤제림
새로 담근 김치를 들고 아버지가 오셨다.눈에 익은 양복을 걸치셨다.내 옷이다, 한 번 입은 건데 아범은 잘 안 입는다며아내가 드린 모양이다.아들아이가 학원에 간다며 인사를 한다.눈에 익은 셔츠를 걸쳤다.내 옷이다, 한 번 입고 어제 벗어놓은 건데빨랫줄에서 걷어 입은 모양이다.☞‘가족’이란 무엇일까요? ‘인생...2015-08-06 07:00:00
- 민지의 꽃-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다섯 살배기 딸 민지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2015-07-30 07: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