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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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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기획/ 조선시대 동철 생산 중심지 창원

북면서 캔 구리로 화폐 만들어 전국 유통

  • 기사입력 : 2013-06-17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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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광이 된 구룡광산의 모습. 박동백 창원문화원장은 이곳이 조선시대부터 동을 생산했던 광산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박동백 창원문화원장이 창원 구룡산 아래 구룡광산과 광미 적치장을 가리키고 있다.(점선 안)
    구룡광산 폐광이 방치돼 있다.
    광미 적치장이 강둑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폐허로 변한 옛 광부들의 숙소.


    과학자 장영실이 채광 지휘·감독

    당시 경상도 채방별감… 구리 캐 조정에 진상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에서 유추해보면
    채광 장소는 북면 구룡산·백월산 일대로 추정



    수많은 채광의 흔적들

    구룡광산엔 갱도·적치장· 숙소 등 남아있어
    백월산 주변에도 광석 채굴했던 개울 등 산재
    ‘일본서 수입하던 동철, 창원産으로 대체’ 기록


    채광, 언제까지 했나

    세종 때 동전 주조되며 구리 생산지로 부상
    채광 힘들고 농사 지정 주자 1439년 채광 중단
    생필품에 구리 쓰여… 동철 생산 이어졌을 것




    ‘경상도 채방별감(採訪別監) 장영실이 창원, 울산, 영해, 청송, 의성 등 각 읍에서 생산된 동철과 안강현 소산 연철 등을 바쳤다.’

    조선왕조실록에 1438년(세종 20년) 9월 15일자로 기록된 내용이다.

    1438년 경상도 채방별감(採訪別監)이라는 직책을 맡은 장영실이 창원에 왔다. 경상도 일대의 철이나 동을 조사하라는 임무를 맡아 경상도 지방을 두루 다니며 동·철 탐사에 나서 여러 곳의 동광·철광을 찾았다. 창원·울산·청송·의성의 동철, 안강의 연철을 발견, 채광해 조정에 진상했다.

    채방별감은 금·은 광산 등 특산물 산지에 대한 탐사 임무를 띠고 파견된 관직으로 채광·제련도 감독했다.

    장영실이 창원에서 채광을 지휘하고 감독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동광은 조선왕조실록(창원 북배동)과 신증동국여지승람(창원 배사동)의 기록 등에서 유추해보면 지금의 북면 구룡산·백월산 지역이다.

    지난 12일 박동백 창원문화원장과 함께 그의 자취를 더듬어봤다.

    창원시 북면 고암리 일원에 위치한 구룡광산을 찾았다. 구룡광산의 갱도 주변에는 광석 채광에 필요한 기자재들이 널려 있고, 채광하던 갱도가 아직 남아 있다. 광산 입구에는 광부들의 숙소였던 건물(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 단층) 10여 동이 폐허가 된 채 방치돼 있다.

    또 광석에서 필요한 광물을 분리하고 남은 광미 적치장이 강둑을 연상시키듯 길게 뻗어 있다. 길이 400m, 폭 100m, 높이 3~5m로 억새가 우거져 접근이 어렵고 광미 적치장이라고는 상상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크다.

    1430년(세종 12년) 무렵 전국에는 66개의 철광과 17개의 제련소가 있었다고 한다. 구리채광은 1423년(세종 5년) 동전을 주조하기로 결정하면서 촉진됐지만, 동전이 화폐가치 하락 등으로 유통되지 않으면서 화폐 주조도 1445년(세종 27년) 막을 내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창원이 동과 철의 주산지라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대부분이 세종 때의 기록으로 이는 세종이 광업도 중요시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1424년(세종 6년)에는 창원에서 동철(구리)의 생산을 시험했다고 한다. 구리 동전을 주조하기로 결정한 이듬해이기 때문에 구리가 많이 필요했을 시기였을 것이다.

    북배동(北背洞·지금의 북면 구룡산·백월산 일대로 추정)에서 군인 30명이 15일 동안 57냥(약 2㎏)의 구리를 고주(鼓鑄·주조)했으며, 또 동이 섞인 생연석 한 말 일곱 되로 연(鉛·납) 58냥을 고주했다고 기록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창원도호부편에는 ‘철은 불모산에서 산출하며, 연동석(鉛銅石)은 부 동북쪽 배사동(背寺洞)에서 산출한다’고 기록돼 있다. 북배동과 배사동은 같은 지역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이 일대는 백월광산 등 채광 흔적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 구룡광산이 가장 크고 최근 40여 년 전까지 채광을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광산이 조선시대 때부터 채광을 했던 곳인지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한국자원연구원에 따르면 구룡광산은 1940년대 초 일신광업개발주식회사로 일본인 기사에 의해 1945년에 개발됐다. 그 후 1971년 3곳의 갱에서 생산 활동이 이뤄졌으며 지금은 폐광 상태이다. 이 기록을 보면 이 광산은 해방 무렵에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또 다른 기록도 있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의 ‘조선기행록’을 보면 읍내에서 북쪽으로 4㎞, 구룡산(460m)의 서쪽 발치에 있는 구룡광산은 1850년대에 문을 열었고, 조선 왕의 감독 하에 운영됐다고 한다. 1893년 한 일본인에게 양도됐고, 1904년 이 광산에서 한 달에 2만㎏ 생산돼 전량이 오사카로 보내졌다고 한다. 하지만 1905년 광석이 고갈돼 폐기됐다고 기록돼 있다.

    또 백월산 주변 반야동에는 이전에 대부분 방연석 광석을 채굴했던 수많은 개울과 웅덩이가 산재해 있다고 전한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이 일대가 조선시대 중요한 동 생산지임에 틀림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이곳에서 장영실이 직접 채광을 지휘하고 감독을 했을 것으로 확실시된다.

    폐광이 된 갱 앞에 서자 찬바람이 휙 몰아친다. 꽤 깊은 갱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26년 3월 20일 호조에서 계하기를 ‘동철(銅鐵)을 왜인에게서 사들이는 것은 본시 영구한 계책이 아니오니 동이 생산되는 경상도 창원부에 100근(60㎏), 황해도의 수안과 장연에서 각각 50근씩 해마다 제련해 상납하며 창원에서 공납하는 정철(正鐵) 400근은 면제해달라’고 돼 있다.

    박 원장은 “1426년부터는 창원이 중심이 되어 일본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던 구리의 대체 생산을 시작했으며, 이곳에서 제련된 구리로 화폐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1439년(세종 21년) 창원에서 나는 동철(銅鐵)은 노력이 많이 들고 힘들기 때문에 캐기가 어렵다는 경상도관찰사의 보고가 있었고, 현지조사 확인 결과 앞으로 구리를 캐는 일은 중단시키도록 조치했다. 광업이 확대되면 농업 노동력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배경에 자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부터는 생필품이나 무기 재료를 얻기 위한 명목으로 그저 명맥만 지속됐을 것으로 보인다.

    박 원장은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창원에서 동철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없지만 조선시대는 놋그릇이 주요 생필품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채광했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조선시대 동·철에 관해 창원을 제쳐놓고는 이야기가 불가능하며, 특히 세종 때 동·철 생산에 관한 기록이 가장 많고, 그 많은 기록에서 창원이 생산과 질에서 사실상 으뜸이다”며 “유적지가 현존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학술적 연구가 없었기에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박 원장은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의 흔적이 있고, 구리 생산의 주요 거점이었던 이곳을 개발해 학생들 체험학습과 과학교육의 장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글·사진= 이종훈 기자 leej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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