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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원전사고 3년, 퇴행하는 일본- 정오복(문화체육부장)

  • 기사입력 : 2014-03-1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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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억은 가슴에, 기억은 머리에 남는다고 한다. 그런데 나쁜 추억과 기억은 망각이라는 편리한 구조로 도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쁜 기억을 망각함으로써 자신을 괴롭히는 원망과 죄책감을 외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각의 유혹에 굴복하는 게 얼마나 비겁한지, 또 그 대가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반드시 체감하게 마련이다.

    망각으로 도피한다는 것은 자신을 용서하거나, 타인으로부터 용서받을 기회를 제 스스로 박탈하는 행위이다. 자신의 과오를 간파당하지 않으려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자신도 혼돈에 빠지게 하는 자기모순을 겪을 수밖에 없다.

    비록 아픈 기억일지라도 과거로부터 배우는 가장 중요한 미덕은 자신의 과오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일주일 전, 3월 11일은 사망·실종 2만 명 이상, 직접 피해만 16조9000억 엔(약 178조 원)에 달했던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지 만 3년이 되는 날이다. 일본으로선 태평양전쟁 패전일보다 더 아픈, 아니 그보다 훨씬 공포스럽게 기억되는 날이다.

    지진은 과거형이지만, 사상 최악의 원전사고로 기록될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 방사능 유출사고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외신 등을 종합해 보면 피해규모는 옛 소련 체르노빌사태의 11배에 가까운 정도로, 일본 국토의 절반 이상이 방사능물질에 오염돼 있으며, 현재도 계속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함께 지난해 8월 제기된 후지산 폭발 300년 주기설(마지막 폭발은 1707년)은 일본인들의 불안감을 배가시키고 있다.

    또 정확한 역학조사는 아직 없지만 일본 내 갑상선, 심장병 환자가 늘고 있다. 특히 노인들에게 많이 걸리던 심장병을 젊은이와 어린이들이 많이 걸리고 있다는 보도는 심상치 않다. 더욱이 도쿄전력이 원전 오염수 저장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저농도 오염수를 바다로 방출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방출한 방사능 물질의 양에 대해서는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었다는 지난 10일 중국 신화통신의 보도는 주변국마저 긴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언론은 “(원전 사고와 관련) 진실을 알리는 것보다 국가 질서를 지키면서 국민들이 놀라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면서 지난 3년 동안 수많은 사실을 숨겨 왔다.

    이렇게 되면서 우리는 1923년 관동대지진 뒤 조선인을 학살하고 군국주의로 치달았던 일본의 어두운 역사 재현 여부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심리적 평형을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을 할 수 있으며, 이성을 잃은 인간이 어린애 장난과 같은 계략에도 쉽게 말려들 수 있다는 것을 과거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혼전의 와중에서 승리를 얻기 위한 계략으로 일부러 혼란을 초래한다는 혼수모어((混水摸魚).

    그런데 일본은 원전사고 후 정도와 방법에 다소 차이가 있을 뿐 궁극적으로 이 전략을 다시 사용하고 있다.

    일본 정치인들은 원전 후폭풍에 대응해 ‘일본 재생(日本 再生)’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원전사고의 충격과 ‘잃어버린 20년’을 지내온 국민들에게 과거 일본 경제력에 대한 향수와 부흥, 그리고 중국의 부상에 대한 경계심을 자극해 우경화 행보를 걷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국수주의로의 회귀는 주변국과의 갈등에 따른 외교적 비용에 비해 국내정치 이익이 더 크다고 여겨지면서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나 ‘강한 일본 되찾기, 새로운 나라 만들기’ 전략이 언제까지 동력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원전사고의 진실 은폐나 조작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또한 ‘평화로운 일상’을 강요당하는 일본 국민들이 언제까지 불안감을 감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장기 불황의 관성에 따른 체념, 잠재된 재해의 공포를 애써 외면하는 만성화된 모습이 현재 일본사회다. 비록 일본인들이 국수주의 행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자발·자의적 행동이라기보다는 소극·체념적 선택에 불과한 것이다.

    망각으로의 도피는 퇴행만 거듭할 뿐이다.

    정오복 문화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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