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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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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기막힌 아빠의 은퇴선물- 신혜영(작가·도서출판 문장 대표)

  • 기사입력 : 2023-04-09 19: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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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는 아빠한테 잘해야 돼. 밖에서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해? 엄마는 평생 돈 한 번 안 벌어 봤잖아.”

    1초 만에 식탁은 반으로 뚝 쪼개졌다. 순간 아빠의 어깨는 개선장군처럼 떡 벌어졌고 젓가락질을 하던 얼굴은 ‘왕이 될 상’으로 변해있었다.

    그렇게 밖에서 돈 버는 아빠와 나는 피를 나눈 부녀를 넘어 더 끈끈한 동지가 되었다. 돈 버는 게 유세냐고 반찬투정 말라며 된장국을 뜨던 엄마는 어느새 식탁에서 자취를 감추셨다.

    200만원 월급에 내 인생 전부를 바쳐야 했던 사회 초년생 시절이었다. 월요일이 두려웠고 직장상사의 눈초리 한방에 내 몸뚱이는 초파리가 되었다. 퉁퉁 부은 눈을 동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같은 층 화장실을 쓸 수 없었다. 이런 취급을 받으려고 회사에 들어왔나? 이를 부득부득 갈다가도 일 못하는 날 용서할 재주조차 없던 모자란 딸은 직장 스트레스를 엄마에게 한방에 고스란히 퍼부어버렸다.

    이십 년이 지나 딸은 엄마가 되었고 그날의 수모는 내 차지가 되었다. 학교 가는 게 유세냐고 불평 말라는 소리가 혀끝까지 나오길 수만 번, 그 소리를 목젖 뒤로 넘기길 수만 한 번째다. 그 사이 연봉의 앞자리가 바뀌고 자동차의 시트가 좀 더 안락해졌지만 자식 뒷바라지를 생각하면 고개가 무릎으로 떨어진다. 엄마는 어떻게 그 긴긴 시간을 버텨내셨을까?

    올해 말 은퇴를 앞둔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건, 가벼운 선택이 아니라 무거운 의무였다. 이 가벼운 단어의 끝도 없는 무게감은 ‘가장’이 되어야만 알 수 있는 평생의 버거움이다. 게다가 돈 버는 일이란, 세상 사람에게 간 쓸개를 다 떼 줘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작가 김훈은 이 세상의 모든 가장이 짊어진 짐을 ‘밥벌이의 지겨움’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전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중략)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이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먹여 살린 건 분명 어머니셨다. 어머니를 존경한다. 집안 살림만 한다는 건, 가족에게 자신의 심장을 갈아내 줘야 하는 일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엄마는 심장을 갈아… 가족에게 떠 먹였으리라.

    창원 대로길 벚꽃이 파르르르 떨어졌다. 이십 년 전 식탁에서 딸에게 심장이 갈린 엄마의 어깨 같았다. 바닥에 떨어진 벚꽃은 정처 없이 나뒹굴며 수없이 밟히고 있었다. 나는 얼마나 수없이 엄마의 심장을 밟았던가? 운전을 포기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엄마 별 일 없지… 아빠 올해 은퇴하시잖아. 엄마도 이참에 집안일 은퇴해요. 딱 8개월만 버티자. 이제까지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그래 딸,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충분치 않았다. 용기가 필요했다. 짓이겨진 벚꽃 잎을 바라보며 말문을 이어갔다.

    “나 어렸을 때… 엄마… 돈 한 번 안 벌어봐서 그렇다고…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한 거…정말 미안해요.”

    잠깐이었지만 긴 침묵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소리 없이 울었고, 누군가는 소리 없이 제 심장을 나누었다. 피를 나눈 모녀가 아닌 심장을 나눈 동지가 되었다. 올 12월, 아빠의 은퇴식엔 근사한 앞치마를 선물해 드려야겠다.

    신혜영(작가·도서출판 문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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