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8일 (일)
전체메뉴

[촉석루] 동네 한 바퀴- 박태종(경남도립남해대학 금융회계사무과 교수)

  • 기사입력 : 2023-11-14 19:50:55
  •   

  • 가을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함께 와서 ‘로버트 프로스트’와 향기를 풍기다가 ‘존 키츠’와 침잠해 가는 계절. 가을은 대체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필자가 근무하는 남해 읍내에는 역사적이면서 개인적인 공간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가을 나들이로 대학 후문에서 90보 정도 직진하면 요산 김정한의 소설에 등장하는, 350년 수령의 신이 붙은 나무라 불리는 회나무가 나온다. 소설 ‘회나뭇골 사람들’은 창씨개명이 강요되던 일제 때 회나뭇골 박선봉 노인 가족이 겪은 일을 소재로 쓴 소설이다. 일제 치하 천대받던 백정 집안의 이야기가 회나무 아래에서 지금도 문득문득 현실로 다가오는 듯한 현장이다.

    조금 직진해서 좌회전하면 남해에서 이름난 효자 김백렬을 기리는 효자문 ‘김백렬 영묘문’이 나오고, 곧바로 일본 신사가 있었던 남산이 나온다. 조선시대까지 하늘에 제사 지냈던 천제당지였는데 일제가 제당을 허물고 신사를 세운 곳이다. 그때 신사 터에 심었던 벚나무가 고목이 되어 우거져 있다. 지금은 남해출신 전몰군경의 영령을 모시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남산에서 내려와 100m 직진해 가면 ‘미공군전공기념비’가 나온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8월 7일 밤 미군 폭격기가 일본군 여수기지를 격파하려다가 고사포에 맞아 남해 망운산에 추락하면서 미군 공군 11명이 전사했다. 당시 일본군은 부서진 비행기와 미군 소지품만 수거하고 시체는 버려뒀는데, 그 현장을 목격한 남해 김 청년이 정성껏 시체를 수습하여 매장했다. 해방 후 1956년 11월 남해 망운산에서 전사한 미국 공군 11명의 넋을 위로하고 공을 기리기 위한 전공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역사의 현장이 김 청년의 희생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임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고 있다. 가을이 깊을수록 ‘저 낙엽을 몇 번이나 더 밟을 수 있을까?’ 하는 감상에 빠지게 된다. 구르몽의 시가 생각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남해 보물섬 곳곳에서 만나는 소소한 일상과 기억이 가을을 더 짙게 무르익게 한다.

    박태종(경남도립남해대학 금융회계사무과 교수)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