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8일 (일)
전체메뉴

[춘추칼럼] 더는 인생의 시중을 들지 않겠다 - 장석주 (시인)

  • 기사입력 : 2023-12-28 21:27:25
  •   

  • 한파가 맹수처럼 한반도를 가로질러 가는 동안 대지 위의 웅덩이와 강은 죄다 얼고, 삭풍은 빈 나뭇가지를 붙들고 울어댄다. 나는 옷을 껴입고 올해의 마지막 일몰을 보러 임진강변으로 나섰다. 저 아래 평지는 월동을 위해 몽골에서 날아온 독수리 도래지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강 이쪽은 평야, 강 너머는 북녘 마을이다. 북녘에서 흘러온 물은 평야와 북쪽 마을 사이를 돌아 서해 쪽으로 무심히 흘러간다.

    밤이여, 오라! 시간이여, 흘러라! 우리는 시간을 달려서 동지도 지나고 한 해의 끝에 닿는다. 지금은 고요 속에 머물며 한 해를 돌아볼 때다. 우리는 다른 처지에서 하루를 맞고 떠나보내는데, 어느 하루도 똑같지 않다. 그 다른 하루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나? 살아보니 인생의 목적을 돈이나 명예, 출세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인생의 여정은 의미를 찾는 것이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불행할까? 병을 앓는 사람도, 직장을 잃은 사람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도 아니다. 삶의 경이를 찾지 못한 채 무미하게 하루를 사는 이들이 불행하다. 줄 없는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같이, 과녁을 겨냥해 화살 없이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같이 사는 이들은 공허하고 불행하다.

    올해 나는 아침마다 사과 한 알씩 먹고, 새로 나온 책을 부지런히 구해 읽으며, 새 책도 냈다. 여름에는 야구장에서 안타를 치고 준족을 뽐내며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내달리는 야구선수를 응원하고, 늦가을에는 대관령에 가서 독일가문비나무 숲속을 걸었다.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이 더 많았다.

    당신의 올해는 어땠는가? 나는 성실한 세탁부처럼 하루하루를 보내고 최선을 다했다. 다만 기대만큼 소득은 없었다. 그래도 좋았던 것은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만한 과오 없이 한 해를 보낸 점이다. 동시대를 사는 우리는 시절 인연으로 맺어진다. 지금 누군가 어디선가 울고 있다면 그는 까닭 없이 우는 게 아니다. 그는 나 때문에 울고 있다. 지금 누군가 어디선가 웃고 있다면 그는 까닭 없이 웃는 게 아니다. 그는 나 때문에 웃고 있다. 당신은 나 때문에 울고, 나 때문에 웃는다. 더러는 서로의 지옥까지 내려가 서로를 물어뜯기도 할 것이다.

    올해도 아이들은 옥수수처럼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 마른 잎처럼 바삭거린다. 누군가는 애기를 낳아 식구를 늘리고, 누군가는 가족을 잃은 슬픔에 잠겨 진절머리를 쳤을 테다. 묵은해를 돌아보고 새해 소망도 몇 가지 적어본다. 새해에는 욕심을 줄이겠다. 책을 덜 읽고, 집안 구석구석에 쌓아둔 책들은 나누겠다. 돈벌이에 소비하는 시간을 줄이겠다. 멀리 떠나는 여행 대신에 벗들과 자주 만나서 많이 웃겠다. 산책 거리를 조금 더 늘리고, 식사는 하루 두 끼만 챙기겠다. 멀리 사는 벗에게는 편지를 쓰겠다.

    새해에 어른은 더 어른답고, 아이들은 아이답기를 바란다. 미아로 떠돈 이들은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실직한 가장들은 새 직장을 구하기를. 학대받는 반려동물들은 더 착한 주인을 만나기를. 당신과 나는 세상의 사막과 황량한 풍경을 더 그리워하고, 우리보다 연약한 동물을 더 사랑하자. 아직 살아보지 못한 미지의 시간과 걷지 않은 낯선 길들을 더 갈망하고, 꿈이 깨지거나 계획한 일들이 틀어지는 것 따위를 무서워하지 말자.

    새해에는 외부의 충고보다 내 안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자. 굶주린 이들은 주린 배를 채우고, 집 없는 이들에겐 따뜻한 잠자리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전쟁으로 시름하는 이들에게 벼락같이 평화가 주어진다면 나는 면도를 하면서 콧노래를 부르리라. 하늘에 더 감사하고, 이웃에게 더 자주 미소를 보이리라. “더는 인생의 시중을 들지 않으련다. 그냥 생긴 대로 살련다.” 나는 결심한다. 늘 옆에 끼고 읽는 시인 아틸라 요제프가 노래한 대로 살겠다고. 망각된 약속들, 망가진 꿈과 기대들, 지루한 기다림들, 이것들은 묵은해와 함께 흘려보낸 뒤 새해에 처음 솟는 해를 벅찬 가슴으로 품으리라.

    장석주 (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