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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8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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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아름다운 산책- 김용택(시인)

  • 기사입력 : 2024-01-17 1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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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이 와 있다. 강물 위로 나온 검은 돌들 위에 눈이 소복하다. 하얀 눈이 마을을 고요하게 덮고 있다. 조심조심 강을 건넜다. 마을을 걸어 나온 내 발자국을 뒤돌아 바라보고 서 있다가 강물을 따라 걸었다. 눈은 가만가만 온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따뜻해지는 나의 마음을, 이 온기를 이해하여 마음에 담고 새 나가지 않게 오래 오래 보관하기로 한다. 그곳에서 따뜻한 내 손이 세상으로 나오게 하자. 사랑이 변하지 않는 그 지점을 나는 걸으면서 배워 왔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세상에 마음을 다 쓰자. 이 글이 산책을 나서는 나의 첫 마음이고 조심하여 올해 내 첫 글이다.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이다. 기쁨이 슬픔을 설득할 수 있는 말들이 있어야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이다.

    글이 중요하지 않다. 삶은 지나가나니, 덧없다. 무정하다. 소용이, 내가, 어디에, 무슨 소용인가. 때로, 써 놓은 내 글 속으로 내가 들어가 편안한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나는 기대한다. 우리는 이렇게 살다 죽고 세월은 흐르고 그때도 저 산에 바람은 저렇게 불고 눈은 내리고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은 저녁 노을로 시를 쓸 텐데, 지금이 아니면 내가 언제 너를 사랑하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될까.

    길 위 관 목 숲에서 나무 쪼는 소리가 났다. 오색 딱따구리다. 검은 꼬리 밑 부분에 진분홍색을 뽐내는 다섯 가지 색의 몸을 가진 새다. 땅 위를 뛰듯 서 있는 나무 몸을 타고 뱅뱅 돌아 뛰어오르며 쫀다.

    숲에 눈송이들이 내리고 숲은 조용한 아름다움을 가져왔다. 큰 눈송이다. 눈송이가 막 타 놓은 솜처럼 성글고 희어서 세상의 어디에 닿아도 소리가 없다. 산을 그려주며 산을 지나온 눈송이들이 강으로 내린다.

    눈을 감고 고요하게 서서 풀숲에 눈 오는 소리를 듣다가 가만히 눈을 뜨고 눈송이들을 따라 강가로 걸어갔다. 눈송이들은 지상으로 내려오며 자신을 응시하고 자기의 태도를 생각하며 내릴 지점을 골라 희게 앉는다. 우리는 왜 사는가. 무엇을 하러 여기 왔는가. 흔적도 없이 허공을 지나온 눈송이들은 강물에 내리는 소리도 파문도 만들 줄 모른다. 가치를 가져오는 곳이 허망과 허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눈이 그쳤다.

    한 시간쯤 강물을 따라 걷다가 다른 길로 강물을 거슬러 걸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응달이어서, 눈이 녹지 않았다. 새와 짐승들과 사람의 발자국이 눈 위에 찍혀 있다. 발자국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딛고 어디를 갔다.

    쥐오리가 물질을 한다. 물속으로 쏙 잠수하였다가 어디만큼 가서 물 위로 푱 나와 동그랗게 퍼지는 파문의 중심에 동동 떠 있다. 쥐 오리가 물속으로 쏙 들어가고 푱 나온다는 이 ‘푱’이라는 말에서는 명랑하고 기분 좋은 물소리가 하늘에서 들린다. 쥐오리가 잠수하면 가만히 서서 저 아이가 어디로 나올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기다리지만 내 예상은 항상 빗나간다.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인다. 몸이 희고 검고 작은 할미새가 꽁지를 까불며 바람에 밀리는 살얼음 가장자리에서 얼어붙은 풀잎을 쪼고 있다. 새의 무게로 살얼음이 밀리며 살얼음이 챙챙챙 소리를 낸다. 너무 멀리 가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다. 천천히 타박타박 걷다가 터덜터덜 걸었다.

    집에 도착하였다. 마른 빨래를 개고 나서 새로운 빨래들을 탈탈 털어 종류와 크기와 모양을 따져 귀와 모서리들을 찾아 맞추어 가며 체계적으로 널었다. 누가 보기에도 좋게, 예술적(?)으로 빨래를 널려고 노력한다. 노력은 모든 일들을 익숙하게 하여 노련하고 세련되게 가다듬으며 삶의 범위를 넓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정돈의 기쁨은 일상의 곳곳에 숨겨져 있다. 빨래를 잘 널고 나서 손을 툭툭 털면 내가 내게 쳐 준 박수 같아 좋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조용한 마을, 아침 산책이 나는 좋다.

    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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