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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한미FTA의 거울, '이레사' 소송사건 - 서익진(경남대 교수·객원논설위원)

  • 기사입력 : 2006-08-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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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치병 환자들이 한미FTA 반대운동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런데 지난 달 28일 서울행정법원은 미국계 다국적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사가 자사의 폐암치료제 ‘이레사’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약값 인하 조치가 부당하다며 제기한 소송에 대해 판결 선고 때까지 가격인하 집행정지 결정을 내렸다. 보도된 판결사유는 “보험약가 인하 조치로 인한 제약사의 손해 예방이 긴급하고 집행정지가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없다”는 것이다.

    제약회사측이 제시한 근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선진7개국의 약가 평균치가 아닐까 짐작된다). 보도를 접한 순간 이 소송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진행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착각을 느꼈다. 현재 ‘이레사’ 1정당 국내가격 62.010원은 미 연방정부입찰가격 49.104원 및 미 국방부·보건소·해안경비대·보훈처에 공급되는 가격 37.966원보다 각각 12.906원. 24.044원 비싸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보건복지부가 약가 적정화 정책의 일환으로 그 가격을 55.003원으로 조정한다는 결정에 제약사가 반발한 것이다.

    한미FTA 협상에서 의약품 관련 쟁점을 보면. 우리 보건복지부가 효능을 인정받은 신약 중 가격 대비 효과가 우수한 의약품만 선별해 보험대상으로 등재하는 방식인 포지티브 방식을 도입하기로 결정하자 미국은 “포지티브 리스트 방식은 혁신적인 신약을 차별하는 것이고 그래서 한국의 환자와 의사들이 신약에 쉽게 접근할 수 없게 된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지난 2차협상을 결렬시킨 바 있다. 우리 정부는 이미 많은 나라에서 포지티브 시스템이 운용되고 있어 미국이 끝까지 반대하지는 못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미국은 약품 특허기간 연장. 특허기간 만료 후 약효는 동일하지만 약값은 싼 복제약 제조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 데이터 독점권 보장. 복제약 병행 수입 금지. 약가 결정에 제약회사의 참가. 공식적인 이의신청제도의 도입. 민간의료보험시장의 개방을 주장하고 있어 혹 포지티브 제도를 대가로 이 요구들을 들어준다면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해질 게 뻔하다. 게다가 이미 도입 합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투자자-국가소송제가 시행된다면 ‘아스트라제네카’사는 국내법정이 아니라 경험상 미국 기업의 승소 가능성이 100%인 국제투자분쟁기관에 직접 제소했을 것이 틀림없다.

    미국은 왜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일까? 주지하다시피 세계 제약업계는 미국 제약사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예컨대 매출액 기준 세계 10대 의약품 중 7개가 미국 제품이다. 신약 개발에는 어마어마한 비용과 시간이 투입되며 새로운 신약 개발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반면 기존 신약들의 특허는 만기가 가까워지고 있다. 미국의 다국적 제약사들의 입장에서 신약의 특허기간을 늘리고 복제약을 금지하는 것은 미래의 생사가 달린 것이고. 미국정부가 이를 국익으로 간주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만약 한미FTA가 이대로 체결된다면 우리 사회에 어떤 결과가 예상되는 것일까? 우리의 국민건강보험제도는 복지국가인 유럽 나라들조차 부러워할 정도로 훌륭한 제도이다. 물론 여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보험재정의 악화라는 문제가 있다. 복지부가 포지티브 제도의 도입을 서두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반면 미국은 우리처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건강보험제도가 없는 대신 극빈층에 대한 의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다고 한다. 미국의 의료수준이나 서비스의 질이 우리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은 인정되지만 극빈층을 제외한 미국민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발달된 민간의료보험제도하에서 비싼 보험료를 지불해야 하는 의료보험상품을 하나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4.300만 명이나 된다. 저소득층의 상당수가 우수한 의료혜택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다국적 제약회사가 약가 결정에 참여할 수 있고 또 의약품의 독점 판매권이 강화된다면 약값은 제약사의 이윤 극대화 논리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환자는 여전히 약효보다 비싼 약값을 지불해야 하고 향후 약값이 인상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환자의 부담만 증대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건강보험 재정 악화로 국민 부담도 늘어날 것이다. 국민의 건강과 보건이라는 공공 서비스가 기업의 이윤 보장을 위해 희생되는 꼴이다. 한마디로 “돈 없으면 죽어라”는 말이 실감나는 사회가 될지도 모른다. ‘이레사’ 소송은 한미FTA가 가져다줄 우리사회의 미래상을 비쳐주는 현재의 거울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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