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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4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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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김철'→'박근혜-김한길' 질긴 인연

[여의도 한담] 선대부터 이어온 대통령-야당대표
김한길 대표 부친 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
1960~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날선 대립

  • 기사입력 : 2013-09-23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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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지난 17일 서울광장 천막당사에서 환갑상을 받았다.

    전날 박근혜 대통령과 국회에서 경색정국 타결을 위한 3자회담을 가졌으나 서로에게 발톱만 세운 채 상황은 더 악화됐다. 종착역을 예단하기 어려운 대치정국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중론이다.

    김 대표 부인 최명길 씨는 김 대표 환갑날 오전 11시께 아들 어진(16)군과 천막을 찾았다. 손에는 미역국이 든 보온병과 갈비찜, 조기구이 반찬이 담긴 보자기가 들려 있었다. 당직자들은 생일 케이크와 선물을 전달했다. 선물은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 국민보고대회’에서 연설하는 김 대표의 모습이 담긴 사진 액자였다. 비서실 직원들은 민주당 상징인 파란색 방한모와 털장갑을 선물했다. 겨울까지 장기전을 불사하겠다는 의미다. 지난 5월 대표로 선출될 때만도 김 대표는 ‘중도온건파’로 분류됐다. 하지만 이제는 ‘투사’가 됐다.

    김 대표와 박 대통령의 갈등은 묘하게도 자신들의 선대 시절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박 대통령과 김 대표는 1952년생 용띠 동갑으로 올해 환갑을 맞았다. 박 대통령은 2월 2일, 김 대표는 9월 17일생이다.

    김 대표의 아버지는 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다. 그는 한국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1961년 통일사회당을 창당해 당 후보로 1971년 대선에 출마했다. 1960~70년대 박 대통령의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날선 대립각을 세웠다. 김 전 당수는 유신시절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사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 김 전 당수는 1994년 69세로 작고했다.

    이 사건에 대해 김 대표는 지난 6월 재심을 청구했다. 서울고법은 최근 김 전 당수에 대해 37년 만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김 대표는 “재판부가 마지막에 무죄를 선고하고 나서 사과의 말을 할 때 울컥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신 시대의 악몽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고 여운을 남겼다.

    40여 년의 시간이 지나 공교롭게도 박 대통령과 김 대표는 대(代)를 이어 대통령과 야당 대표로 정치를 이끌고 있다.

    박 대통령과 김 대표는 정치입문 전 작가와 방송인으로 만났다. 김 대표는 1993년 대통령의 외동딸과 평범한 남자의 연애를 그린 ‘여자의 남자’라는 소설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유명세를 타고 TV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을 진행했다. 그 프로그램에 수필집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을 낸 박 대통령이 작가 자격으로 출연했다. 1979년 청와대를 떠나 칩거 생활을 하던 박 대통령이 수필가로 등단한 뒤 14년 만에 대중 앞에 선 것이다.

    당시 김 대표는 “박근혜 씨가 청와대 안주인 노릇을 하는 동안 저는 긴급조치로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면회 다니면서 세월 까먹으면서 살았다. 우리가 이렇게 다른 사람인데 한 시간 동안 그렇게 잘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참 좋은 일이다”고 ‘가시 돋친’ 말로 맺었다. 박 대통령이 난처해했다는 후문이다.

    이후 김 대표는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비례대표로 15대 국회에 입성했다. 박 대통령은 1998년 대구 달성 보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이들은 2006년에는 제1 야당인 한나라당 대표와 여당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로 만났다. 당시 박근혜 대표는 사학법에 반대하며 장외투쟁을 주도했다. 하지만 “명분이 약하다”는 당 안팎의 비판 여론이 컸다. 정국 대치가 이어지자 김 대표가 당시 한나라당 이재오 원내대표와 이른바 ‘산상회담(山上會談)’을 통해 사학법 재개정 논의를 고리로 정국 정상화에 합의했다.

    김 대표가 당내 강경파의 반발을 무릅쓰고 50여 일간 장외에 있던 박 대표에게 국회복귀 ‘명분’을 만들어준 셈이다. 박 대표에게는 출구가 열렸지만 김 대표는 “해서는 안 될 양보를 했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7년이 지난 2013년, 대통령과 제1 야당 대표로 만난 두 사람은 또다시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정치권에선 지난 16일 3자회담을 앞두고 “박 대통령이 통 큰 양보로 7년 전 김 대표에게 진 빚을 갚지 않겠느냐”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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