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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2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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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부부총 100년만의 귀환… 정말 부부일까?

겉은 가야를 닮았고 속은 신라를 담았다
역사- 일제강점기때 파헤쳐져 반출, 1938년 도쿄제실박물관 기증
구조- 봉토 지름 23m·높이 3m 규모, 발굴 당시엔 입구 돌로 막혀

  • 기사입력 : 2013-11-22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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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산시 북정동에 위치한 부부총.

    눈여겨볼 유물 '부부 목걸이'
    양산 부부총 발굴 당시 사진.
    양산 부부총 내부 실측도.




    양산유물전시관 기획전시실에서 내년 1월 12일까지 열리고 있는 ‘백년만의 귀환’ 양산 부부총 특별전시회에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부부총의 구조와 눈여겨볼 유물 등을 자세히 살펴본다.


    ▲신라와 가야를 품은 고분, 부부총

    양산 부부총은 낙동강의 지류인 양산천 유역에 형성된 넓은 평야지대를 향해 뻗어 내린 능선 정상부를 따라 대형봉토분(大形封土墳)이 나란히 우뚝 솟아 있다. 이러한 북정동 고분군의 양상은 가야지역의 일반적인 수장급 고분군과 매우 유사하다. 창녕, 고령, 함안 등의 가야의 수장묘는 구릉의 정상부나 높은 곳에서 중심지를 조망하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 고분이 단순히 왕이나 귀족의 무덤이 아니라 백성들을 보호 감시하는 암묵적 통치의 기능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거대 규모의 고분을 능선의 정상부에 쌓음으로써 무덤은 실제보다 더 크고 웅장한 느낌을 지니게 된다.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어 양산지역의 신라고분들은 가야문화적 요소들을 닮았다. 그러나 조사된 유구와 유물은 신라문화에 가깝다.

    ▲파헤쳐진 한반도

    일제는 1910년 한일병탄 이후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의 일부를 지배했다는 학설에 뒷받침이 될 만한 증거를 찾고자 가야지역 고분 발굴에 주력했으며 대부분의 고분조사는 발굴이라는 명목 하에 파헤쳐졌다.

    그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우리나라를 떠나 반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무작위로 파헤쳐진 고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확증할만한 유물이 발굴되지 않았고, 유물에 대한 약탈만이 있을 뿐이었다.

    ▲13일간 양산지역 최초로 고분 발굴

    1920년 양산지역 고적조사의 주목적이 고분발굴이었음은 보고서에도 명기된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양산시 북정동 산에 위치한 이 고분을 신라의 무덤으로 유물이 풍부할 것으로 추정해 처음 유물 수집을 목적으로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양산지역의 고분 중 왜 북정동 고분군을 선택했는지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으나 발굴자인 오가와 케이기치는 당시 18개의 고분 중 부부총이 중간쯤에 위치해 있어 축조연대가 그 중간쯤일 것으로 생각해 발굴했다고 전한다. 1920년 11월 13일 발굴이 시작돼 11월 25일까지 13일간 발굴됐으며, 1927년 ‘고적조사특별보고’가 간행돼 발굴기록을 비교적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유물들은 1938년 3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도쿄제실박물관(도쿄국립박물관 전신)으로 기증됐으며, 1958년 제4차 국교정상화회담에서 문화재 반환문제가 거론돼 되돌려 받을 기회가 있었으나, 일본국립박물관에 진열하겠다는 일본 측의 요구에 반환이 보류됐다.

    ▲무덤 속 주인은 정말 부부일까

    1500년 전의 무덤주인은 아무 말을 해주지 않는다. 다만 무덤에서 확인되는 유물을 통해 이들이 부부일 것이라 추정하는 것이다. 가령 부부총에는 자루 끝에 둥근 세 개의 환을 붙여 만든 삼루고리자루큰칼이 출토됐다. 기록에 따르면 고리자루큰칼은 2세기쯤 널리 퍼져 무기로 쓰였으며, 유물이 출토된 위치나 성격으로 볼 때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된다. 귀걸이 또한 가는 것과 굵은 것이 있다. 신라의 무덤에서는 대체로 가는 것은 남성이, 굵은 것은 여성이 착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부장유물의 성격으로 볼 때 남녀임은 확실하고, 부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무덤의 주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견이 있다. 당시 삽량 도독인 김서현 장군 부부의 묘라 하기도 하고, 김서현의 사위가 산성의 성주로서 백제군과 대치 중 전사해 이곳에 묻혔다는 설도 있다.

    누구의 무덤인지 명확하게 판단할 단서는 없다. 다만 부장유물을 통해 무덤 주인의 신분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허리띠꾸미개는 금제, 은제, 금동제로 나뉘어, 착용한 사람의 지위를 반영한다. 부부총에서는 은제 허리띠꾸미개 2점이 출토됐는데 같은 시기 경주의 신라귀족 혹은 왕 무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주인은 신라 때 양산을 통솔한 수장이거나 거대한 정치세력을 가진 지방 군주일 것이다.

    ▲부부총의 구조

    부부총은 봉토(흙을 쌓아올린 부분)의 크기가 지름 23m, 높이 3m인 원형의 봉토분이다. 봉토 둘레에는 비나 바람으로부터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護石)과 주구(周構)를 만들었다. 부부총의 중심이 되는 석실은 동서방향을 장축으로 해 길이와 너비, 높이가 각각 5.49m×2.7m×2.58m인 긴 직사각형의 형태이다. 무덤의 출입구는 서쪽 방향으로 뚫었고, 나머지 동·남·북벽은 깬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렸다. 서쪽의 입구에는 양옆에 돌을 쌓고 중앙 부분을 입구로 사용했는데, 발굴 당시에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다.

    시신이 놓이는 부분에는 높이 80㎝ 정도의 주검받침(屍床臺)을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주인의 시신이 놓일 부분은 80㎝로 쌓고 반대편은 30㎝정도 낮게 조성했으나 후에 부인을 추가로 매장하는 과정에서 낮게 조성한 받침 부분을 주인이 놓인 부분과 동일한 높이까지 높여 나란하게 안치할 수 있게 조정한 것으로 파악된다. 주검받침의 밑에 안치된 3구의 시신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관계로 정확한 매장경위를 파악하기 힘들다. 많은 학자들의 추정대로 순장일 수도 있다.

    ▲부부총 특별전시에서 만날 유물은

    남편의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은 금동관, 관모(冠帽), 관식(冠飾)을 비롯해 가는고리귀걸이, 곡옥목걸이, 은제허리띠와 허리띠드리개, 금동신발과 세잎둥근고리자루큰칼 등이며 부인의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은 자작나무로 만든 관모와 은제관식, 굵은고리귀걸이, 목걸이, 금제·은제·유리제 팔찌, 은제허리띠와 허리띠드리개, 철제 가위 등이 있다.

    그 밖에도 부부의 방에는 다량의 토기와 마구(馬具) 등 다양한 물건들을 만들어 부장함으로서 내세에서도 사용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눈여겨볼 유물 ‘부부 목걸이’

    이번 전시에서 특별히 눈여겨볼 유물은 부인용 곡옥목걸이(위 사진)이다. 중앙에 붉은 마노로 만든 곡옥을 달고, 수정, 치옥, 순금, 청색유리 등을 매달아 치장했다. 특히 이 보석들을 은사로 꿰어 발굴 당시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반면 남편 목걸이는 가운데 커다란 비취 곡옥을 달았다. 남편 목걸이가 단순하고 육중한 느낌이라면, 부인 목걸이는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김석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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