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신년 축시] 유홍준 시인 '정직한 것을 심어 정직한 것을'
- 기사입력 : 2014-01-02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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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눈은 검지만
쌀의 눈은 희다
짐승의 눈은 이마 밑에 조그맣게 달려있지만
쌀의 눈은 제 정수리 위에 척하니 올라앉아 있다 쌀눈이 부처님,
쌀눈이 하느님이다
새해 첫날 첫 아침엔
여러 가지 반찬 말고
정갈한 김치 한 보시기에 새하얀 이밥, 이것만으로 식사를 하자
하얀 종이를 펼치고
자세를 고쳐 앉고 무언가를 써 보자
흰 눈 위를 걸어간 발자국처럼
또박또박 내가 쓴 글자들이 발자국을 찍으며 나아가도록 해 보자
그 발자국들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들여다보자
욕심을 버리지 말고
새해엔
마음껏 욕심을 부리자
볍씨처럼 한 알을 심으면 한 됫박이 되는 것을 생각하자
벼 포기처럼 서너 낱을 심으면 한 주먹이 되는 것을 생각하자
감자의 눈처럼 두어 개를 잘라 묻으면 주렁주렁 한 바가지가 달리
는 것을 생각하자
복권 같은 거
요행 같은 거 말고
나를 내어주면 나에게 덤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을 생각하자
정직한 것을 심어 정직한 것을 거두자
공장에 가는 사람들은 허리를 쭉 펴고 공장엘 가자
화물차를 모는 사람들은 선한 눈빛으로 화물차를 몰자
학교에 가는 사람들은 두 주먹을 꼭 쥐고 학교에 가자
시커먼 짐승의 눈, 시커먼 짐승의 눈빛 말고
맑고 고운 눈으로
새해에는 온 식구의 발을 씻어주자
손톱을 깎아주고 발톱을 깎아주자
아들아 너도 이제는 어른,
이 옷을 입고 멀리멀리 갔다오렴
새해엔 내가 가장 아끼는 옷을 아들에게 입혀 주자
툭툭, 어깨를 두드리고 격려를 해 주자
●작가 약력 △산청 출생 △1998년 시와반시 등단 △시집 ‘상가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등 △소월시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시작문학상 등 수상 △현재 이병주문학관 사무국장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