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5월 02일 (목)
전체메뉴

[세상을 보며] 보리밥과 문화- 이문재(문화체육부 부장대우)

  • 기사입력 : 2014-03-05 11:00:00
  •   




  • 가끔 별미로 보리밥을 먹을 때마다 달지도 쓰지도 않은 웃음을 짓는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 일주일에 한 번씩 도시락 검사를 받은 기억 때문이다.

    당시 ‘혼식의 날’이면 선생님이 도시락에 보리쌀이 섞였는지, 아닌지를 일일이 뚜껑을 열어 보며 검사를 했다.

    ‘혼식의 날’은 국가가 부족했던 쌀 소비를 줄이고, 대신 보리 등 잡곡 섭취를 권장하기 위해 제정·운영한 제도다.

    이런 날 깜빡하고 흰 쌀밥만 싸온 친구들이 꼭 몇몇은 있었다. 검사 시간이 다가오면 부랴부랴 보리밥을 구하느라 난리를 떨었던 모습이 선하다.

    선생님이 모를 리가 없다. 그래도 꿀밤 한 대로 그냥 넘어간다. 쌀밥 도시락을 싸온 녀석들을 꾸짖어 봤자, 별반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제자들한테 국가경제며 농촌의 현실, 식량안보가 어떻다고 한들 제대로 알아 먹겠는가.

    대신 잡곡밥은 키도 많이 크고 소화도 잘돼 건강에 좋다는 설명으로 혼식을 권했다.

    ‘혼식의 날’뿐 아니라 당시에는 ‘무슨 날’이 무척 많았다는 기억이다.

    ‘쥐 잡는 날’도 있었고, ‘기생충 박멸의 날’도 있었다. 또 학창시절 내내 교복 윗주머니에 구멍이 숭숭하도록 달고 다녔던 리본에는 ‘불조심 강조기간’, ‘멸공방첩 승공통일’, ‘잊지말자 6·25사변’, ‘에너지 절약’ 등 숱한 구호가 줄을 이었다.

    현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다소 우습기도 황당하기도 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참으로 절실하고 또 진지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우습기도 황당한 ‘무슨 날’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 덕분에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쌀 한 톨이 귀한 줄도 알고, 에너지의 소중함, 나라와 이웃을 걱정하는 마음, 사회 구성원으로 지켜야 할 규범들을 몸에 익혔을 것이다.

    최근 또 ‘무슨 날’이 생겼다. 정부가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정해 각종 공연과 전시, 스포츠 시설을 무료로 개방하거나 대폭 할인을 해주고 있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이라 ‘매·마·수’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고, 지난 2월 행사에는 대통령이 직접 공연장을 찾아, 소문이 빠르게 확산 중이다.

    이날은 일상에 쫓기며 사는 국민들에게 좋은 문화 콘텐츠를 제공하고, 또 참여 기회를 많게 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문화산업 활성화를 유도하는 목적도 있다.

    한마디로 문화시설의 문턱을 낮춰 많은 사람들이 문화의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정부 주도의 문화정책인 것이다.

    이날은 기본적으로 영화는 5000원에 볼 수 있다. 공연이나 전시의 경우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무료 또는 30~50%의 할인 혜택이 있다. 스포츠 관람의 경우 어린이를 동반하면 50%가 할인된다.

    ‘문화가 있는 날’에 대한 반응은 어떨까. 문화융성위원회가 국·공립문화시설을 대상으로 집계한 결과, 전년 대비 평균 50% 이상씩 증가했다,

    민간 문화시설은 집계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현장 분위기를 보면 찾아오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도내의 경우도 반응이 꽤 좋은 모양이다. 도립미술관과 박물관 등을 찾는 발길이 다소 늘었고, 방문객들은 무료 입장을 반기는 분위기다.

    이번 ‘무슨 날’은 참으로 유쾌한 캠페인이다. 강요가 아닌 권유라 그렇고, 목적 또한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 매개체가 ‘문화’라 하니 즐겁고 가볍게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문화를 즐기는데 ‘무슨 날’을 정해서 해야 한다는 게 어색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참여하면, 억지가 버릇이 되고, 버릇이 좋은 습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별미로 보리밥을 찾는 것처럼 문화도 그렇게 되길 기대해 본다.

    이문재 문화체육부 부장대우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