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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8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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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무식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이병문(사회부장)

  • 기사입력 : 2014-03-19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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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면서 ‘내가 찍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뜬눈으로 개표 방송을 지켜보며 흥분된 가슴으로 새 아침을 맞았지만 대통령이 바뀐 후에도 전과 변함없는 내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나는 여전히 같은 장소에서 밥을 먹고, 같은 일을 하며 같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당선자의 웃음 뒤로 나를 낮춰보는 것 같은 역겨움을 발견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매번 그 사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면서도 지방선거가 코앞에 닥치니 아픈 기억은 사라지고 ‘근거없는 새 세상’이 또 무식한 나를 유혹한다.

    집권당은 청와대를 필두로 정부 부처 장관까지 나서 장밋빛 청사진을 밝힌다. 야당도 질세라 맞불을 놓는다. 남북관계 등 이념적 이슈가 선거 결과를 갈랐던 예전과 달리 이젠 주머니를 채워주는 정책이나 공약이 나의 마음을 혹하게 한다.

    출마자들은 우선 내지르고, 당선되면 끝이다. 용산 재개발을 추진하겠다는 모 예비 후보의 발언으로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이 춤을 췄다. 경남도지사 선거에서는 폐업한 진주의료원의 재개원, 도청 마산 이전 등에 대한 논란이 불붙고 있다. 창원시장 선거에선 광역시 승격, 청사 소재지, 야구장 후보지 등이 뜨거운 감자다. 동네의 경우, 표를 유혹하는 정책의 태반이 길을 포장하고 넓혀주겠다는 것이다.

    지방자치제 이후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도로가 뚫린 게 아닐까 할 만큼 ‘삽질’의 득표력은 대단하다. 모르긴 해도 동네 뒷산 중 트랙터나 경운기가 다니는 곳 중 포장이 안 된 곳이 없을 정도다.

    미국도 삽질 공약에서 예외 아니다. 워싱턴에 있는 ‘정부의 예산 낭비에 반대하는 시민들(CAGW)’을 오래전 방문한 적이 있다. 예산 낭비 사례를 매년 ‘의회 돼지의 책(Congressional Pig Book)’이라는 제목으로 낸다. 알래스카의 ‘갈 곳 없는 다리(Bridge to Nowhere)’라는 별명이 붙은 사업이 기억에 남는데 연방정부가 지난 2005년 알래스카 그라비나 아일랜드(Gravina Island)에 사는 50여 명의 주민(하루 차량 통행량 1000대)을 위해 3억1500만 달러(3364억 원 상당)의 예산을 배정한 것이다. 논란 끝에 사업은 물거품이 됐지만 이를 주도한 당시 주지사 사라 페일런에겐 큰 오점으로 남았다.

    어느 나라든 선출직은 유권자가 한눈만 팔면 이같이 헛발질을 한다. 모르고 넘어가면 그만이고 알아도 임기 내 달라질 것이 없다는 배짱이다.

    무식한 나를 혹하게 만드는 삽질공약이 나쁜 건 첫째 의도가 잘못됐거나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들이 위세에 눌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거나 직무를 유기하는 등 비겁하기 때문이다. “김 씨 농장 진입로 포장공사를 했으니 박 씨 집도 뺄 수 없고 그렇게 10여 년 하다 보니 포장 안 된 곳이 없다”던 어느 면장의 하소연은 웃음거리가 아니라 되새겨야 하는 공직자의 반성문이어야 한다.

    셋째는 씀씀이까지 승자독식방식이다. 대단지나 힘 있는 선출직이 사는 아파트는 자치위원회나 부녀회에서 나오는 돈이 넘치는데도 행정기관의 정책이나 예산 지원에서 뒤처지는 법이 없다. 반면에 소규모 아파트는 힘도 돈도 없고 공터까지 없어 시설을 할 엄두도 못 낸다.

    더욱 가관인 것은 공약이 대개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식의 말장난이라는 것이다. 균형발전을 약속하다가 재미를 본 다음에는 슬그머니 수도권 규제완화를 들고 나오는 식이다. 둘 중 하나는 불가능한 약속인데도 정치권이나 선출직들은 눈 가리고 아웅 한다.

    무식이 정말 자유롭게 활개 친다.

    ‘무식은 신의 저주이며, 지식은 하늘에 이르는 날개’라고 한 셰익스피어의 말이 지방선거를 앞둔 오늘, 내 마음속에서 물구나무를 섰다.

    이병문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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