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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6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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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삼년을 잘 이겨냈구나

이제 족쇄 풀고 마음껏 날길…
창원경일여고 최달유 선생님이 딸에게 보낸 편지

  • 기사입력 : 2014-11-1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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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3 학부모이면서 창원경일여고 교사인 최달유 선생님이 13일 수능을 친 창원여고에 다니는 딸에게 보낸 편지다.


    수능대박! 올해 수능을 치른 64만명 수험생들의 단 하나의 간절한 바람. 그러나 얼마나 허황된 명제임을 잘 알기에 차마 딸에게 꺼내보지도 못했다. 적(籍)만 올려놓고 게을러 잘 가지 않는 교회에라도 가서 하루 종일 기도라도 하면 이 불안한 마음 위안받을 수 있으려나. 대입 수능, 사회 진입을 위한 성인식 같은 통과의례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고 감내해야 할 정신적 고통이 너무 크다.

    사랑하는 딸! 새벽 어스름을 뚫고 길을 나서 밤 11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는 힘든 삼 년을 참 잘 이겨냈구나. “피곤하다, 아프다”는 불평 한마디 없이 쉬지 않고 달려왔구나. 숨 막히는 교실, 책상 크기만의 좁은 공간에서 매일 15시간을 버티었구나. 점심 나절 해바라기라도 할 양으로 나선 운동장 걷기마저도 시간에 쫓기듯 했겠지.

    새벽밥, 돌 씹는 심정일 것 같아 무르게 무르게만 밥을 했는데도 돌 고르듯 밥알을 세다 허겁지겁 국에, 물에 말아 한두 숟가락으로 허기만 채운 채 종종걸음으로 하루를 시작했지. 포악한 잠과의 전투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무수한 활자들과 힘겨운 싸움을 하느라 지친 너. 깊은 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대문을 밀고 들어올 때는 툭 건드리면 낙엽처럼 바스락거릴 듯 애처로웠지.

    입시 스트레스로 날카로운 신경이 사기그릇처럼 쨍쨍거리는 일상을 넉넉히 받아주지 못하였구나. 피로해진 심신을 추슬러야 하는 느긋한 일요일마저 TV 보지 말라며, 휴대전화 만지면 안 된다고 안달하며 고함만 쳤구나. 빨리 일어나라, 빨리 밥 먹어라, 빨리 준비해라, 종말이 올 것처럼 빨리 빨리만 강요하였구나. 부모의 사랑이라는 가면으로 너무 쉽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닌지 후회스럽구나.

    입시 한파에 두터운 겨울옷 꺼내 입으며 “떨려서, 긴장되어 아무 생각 없다”고 하소연할 때도 따뜻한 말 한마디 자신 있게 못해줬구나. 분명 슬픈 일이 아닌데, 오늘 아침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다 눈이 흐려진 것은 지난 세월 잘해주지 못한 주체할 수 없는 부끄러움 때문이었으리라.

    고물거리던 아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훌쩍 커버렸구나. 사춘기도 모르게 지나갈 만큼 속 한 번 썩이지 않았던 착하고 고운 우리 딸. 진부하지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 외에는 떠오르는 말이 없구나. 담담하고 겸허하게 결과를 기다려 보자. 졸업 선물로 준비한 제주도 여행에서 그동안의 스트레스, 고민을 털어버리고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통해 밀린 아빠의 숙제를 해볼 요량이다.

    이제 세상의 많은 족쇄를 풀고 높은 하늘을 향해 마음껏 날아보려무나. 가끔은 일상을 뒤집어 흔들어도 괜찮을 것이고, 취한 척 비틀거려도 용서받을 것이다. 청춘이므로.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것,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라. 돌보지 않아 피폐해진 자신을 보듬고 뜨겁게 감싸주도록 해라. 먼 훗날 자신을 끔찍이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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