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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삶으로부터 떠나가는 당신- 차재문(연강산업 대표이사·수필가)

  • 기사입력 : 2023-06-11 19: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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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물 중에 오월의 초록만큼 눈부신 색감을 지닌 것은 없다. 봄 잎사귀의 새 빛은 감동이다. 인간은 고작해야 연세로 불리는 짧은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지만, 나무는 연륜이 쌓인 아득한 세월을 산다. 노거수라 해도 봄이면 어김없이 여린 새잎을 피워낸다. 영겁의 세월 속 나무의 영혼은 더러 바람 따라 출렁인다.

    지난해 오월 중순 나는 지리산 둘레길 15구간 출발지인 하동군 화개면 원부춘마을에서 후산의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걸었다. 낯선 길로의 걸음은 언제나 새로운 만남을 선물한다. 형제봉으로 향하는 오르막 마을 길을 걷다가 사람 키보다 높은 담장을 넘고 있는 담쟁이를 보았다. 도종환 시인의 시처럼 담쟁이들이 꿈꾸는 열망이 있다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몇 발자국 떼다가 헐거운 슬레이트집 계단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구순을 바라보는 할머니는 17살 때 섬진강 건너편 광양에서 시집와 한 번도 이 집을 떠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길냥이와 강아지 덕분에 오순도순 잘 살아간다면서 해가 지기 전에 몇 번이나 졸린다고 독백 같은 말을 이어갔다. 평생 숙제처럼 등에 얹혔던 삶이 늙고 낡은 몸으로 조금씩 떠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이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잊히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편안히 삶 다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나는 배낭에서 육포를 꺼내 길냥이와 강아지에게 물리고 할머니에게 백설기를 건넸다.

    인간은 홀로 행복할 수 없다. 외로움은 질병처럼 사람을 해친다. 할머니가 그날 만난 낯선 사람은 나 하나였으리라. 말벗의 대가로 앵두를 따 먹으라고 몇 번이나 말했던 할머니, 길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곁눈질로 길냥이와 강아지에게 애틋한 눈길을 보내던, 구릿빛 얼굴에 골이 깊은 주름을 새긴 당신도 청춘의 어느 한때는 푸르게 감성으로 물들었으리라. 하지만 나무와 달리 인간의 젊음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이른 새벽 펜을 든 길손은 기억 속 할머니의 행복을 빌며 안부를 묻는다.

    차재문(연강산업 대표이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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