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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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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인어의 시간- 곽민주

  • 기사입력 : 2024-01-01 21: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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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영은 계단과 엘리베이터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다. 지하 2층에서 지상 2층까지 고작 4개의 층을 오르면 되는 일이었으나 주영은 꼭대기 층에 머물러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언덕배기에 있는 병원 입구에 도착하기까지 관자놀이에 맺혀 있던 땀은 어느새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주영은 손등으로 제 얼굴을 간지럽히는 땀을 닦아내고는 곧바로 손부채질을 했다. 몸에 있는 더운 기운을 빼내기 위해 입 밖으로 후우하고 바람을 불 때마다 어금니 안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가만히 있을 땐 얼얼한 느낌이었고, 물을 마실 땐 시린 것 같았으며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땐 윗니와 딱딱 부딪히는 감각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이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주로 묽은 음식을 먹었다. 죽집에서 흰죽의 갈기를 미음 수준으로 포장해 티스푼으로 조금씩 떠먹었으며, 달콤한 음식이 먹고 싶을 땐 건더기가 없는 주스나 우유를 마셨는데 그마저도 혓바닥의 맛이 느껴지기 전에 치아에 닿지 않도록 목구멍으로 빠르게 삼켰다. 마침 정기 검진까지는 약 3주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주영은 이번에야말로 충치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병원 예약 일정을 변경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땐 직원으로부터 정기 검진보다 예약 일자를 앞으로 조정하긴 어렵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여름방학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고, 그보다 사실은 두 달 전에도 같은 이유로 병원에 방문했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한데, 정말로 이가 시려서 그래요. 예약을 좀 앞당길 수 없을까요?

    진료 예약은 다른 환자분이 취소를 하지 않으면 변경해 드리기가 어려워요. 통증이 심하시면 진통제를 드셔보시거나 개인 병원에 가시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어요.

    그럼 다른 분이 예약 취소를 하시면…….

    그런 경우는 거의 없고요. 당일 접수를 하시면 대기는 있겠지만 오늘이라도 진료를 받으실 수 있어요. 그렇게 하시겠어요?

    휴대전화 너머 직원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두 달 전에도 주영이 연락을 했을 때 진료 일정을 빠르게 앞당겨 주었던 그 직원이었다. 그때에도 직원은 주영에게 들으라는 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주영은 손톱을 물어뜯던 손으로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달력을 찬찬히 넘겨보았다. 달력의 마감 부위마다 침이 묻어 종이가 너덜너덜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이라 그런지 대기실에 마련된 의자에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채워져 있었다. 진료실과 영상촬영실, 그리고 기공실이 마주 보고 있는 가운데 주영은 진료실이 보이는 방향에 등을 맞대고 앉았다. 이름이 불리면 빠르게 제 차례에 맞게 진료실에 입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영은 대기를 하는 동안 두 번이나 자리를 바꿔야만 했다. 첫 번째로 골랐던 자리는 창가 쪽이어서 자연광이 그대로 들어왔는데 에어컨 바람이 적당히 불어와 최적의 자리였으나 어쩐지 정수리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두 번째로 옮긴 자리는 햇빛을 피할 수 있었으나 머리 바로 위에 42인치 TV가 놓여 있어 그것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세 번째로 자리를 옮겼을 땐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들이 제법 도착해 있었기 때문에 마음엔 들지 않았지만 그나마 제일 안전하게 보였던 가운뎃줄의 중간 자리에 앉았다. 윤기 없는 흰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여자와 배가 남산만 하게 불러온 남자가 양쪽에 앉아 있었다. 여자는 자꾸만 주영 쪽으로 몸을 기대왔으며 남자는 다리를 쩍 벌리고 있었고, 뒷사람은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큰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영상촬영실에 들어가기 전 주영은 깜빡하고 귀걸이를 빼지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 4번 방으로 가라는 직원의 말에 귀걸이 뒤축을 빼내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주영에게 눈인사를 하던 직원은 두꺼운 보호복을 입혀주면서 이름을 묻고, 차트를 살펴보았다.

    환자분, 엑스레이 자주 찍는 거 안 좋아요. 1년에 한두 번 찍을까 말까 해야 하는 건데…….

    죄송하다고 말을 할까, 아니면 내가 필요해서 찍는 것인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말을 할까 하다가 주영은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자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유독 치아에만 집착을 하는 예민한 사람이거나, 잘못하지 않은 일에도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고 보는 나약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그렇지만 주영은 정말로 이가 시려서 병원에 왔다. 꾀병도 아니었고, 집착도 아니었다.

    저 그냥 다음에 올게요.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주영은 보호복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원은 주영을 말리지 않았다. 영상촬영실에서 나와 복도를 걷는 동안 주영은 앞니로 입술을 깨물었고,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혀끝에 이가 닿을 때마다 다시 시린 통증이 시작되었다. 주영은 단지 통증의 원인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 주영은 진료영수증을 가방 속에 대충 구겨 넣고는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왔다.


    주영은 신고 있던 신발을 벗자마자 손에 쥔 전단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 금세 화장은 흐르는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주영은 티슈 몇 장을 뜯어 얼굴을 닦고는 곧바로 휴지통에 집어넣었고 냉장고에서 꺼낸 물을 진통제와 함께 빠르게 삼켰다. 물을 마시고 난 뒤엔 곧바로 컵을 씻어 건조대에 말렸다.

    주영의 집은 3층에 있는 6평짜리 원룸으로, 2002년에 지어진 빨간 벽돌집이었다. 바닥에 싱글사이즈의 목화솜요를 펼쳐놓으면 발끝엔 화장실이, 화장실 뒤편엔 부엌이, 머리 위쪽엔 세탁기가 숨겨져 있는 작은 베란다가 전부였다. 이곳에서 주영의 짐은 가로 80폭의 하얀 좌식 테이블과 목화솜요, 그리고 몇 벌의 옷과 화장품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특별한 행사가 없다면 여름엔 검정 슬랙스에 기능성 검정 티셔츠 두 개를 돌려 입었고, 겨울엔 그 위에 흰 셔츠를 껴입는 식이었다.

    주영은 더위가 식자마자 청소포를 꺼내 바닥을 밀기 시작했다. 바닥과 테이블 위에 쌓인 먼지는 하루에 두 번을 닦아도 늘 똑같이 쌓여 있었다. 바닥을 다 밀고 난 뒤엔 모든 물건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는지, 모두 같은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주영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전단지를 들어 분리수거함에 집어넣으려다 창문을 바라보았다. 봄 겨울 할 것 없이 벽을 타고 기어들어오는 거미 때문에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창문을 열지 않는 편이었는데, 그러는 바람에 엄지손가락 크기의 거미 한 마리가 창문의 한 면을 커다란 거미줄로 채워 넣고 있었다. 전단지는 병원 인근에 있는 아파트단지의 스포츠센터 광고였으며, 수영과 골프, 헬스와 테니스가 차례대로 안내되어 있었다. 주영은 분리수거함에 버리려던 전단지를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베란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 바로 앞에 놓여진 세탁기와 그 옆에 창고로 쓰이는 공간이 있었는데, 현재는 우혁이 놓고 간 물건들을 방치해 놓은 것이기도 했다. 우혁의 물건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주영의 것이 분명할지도 몰랐다. 오래전에 버렸어야 할 이젤과 유화가 그려진 캔버스였다. 이젤의 각진 모서리에는 우혁의 수경과 수모가 매달려 있었다. 그 밖에도 사진이나 커플링, 기념일에 받았던 귀엽기만 하고 쓸모없는 물건들이 옅은 하늘색 상자에 담겨 있었다.

    우혁과 함께 살 때까지만 해도 집이 이렇게 단정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주영이 습관적으로 정리를 하는 성격이었다면 우혁은 물건이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어도 저마다의 규칙이 있다고 믿는 편이었으니까. 동거를 시작한 이후, 두 사람은 그런 사소한 것을 이유로 자주 다퉜다. 주영은 때로 자연인 같은 우혁의 생활습관을 이해하지 못했고, 우혁은 주영이 지나치게 강박적이라고 투덜대곤 했다. 그렇지만 잘못의 여부에 관계없이 끝내 먼저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비는 쪽은 우혁이었다. 우혁이 먼저 나서지 않으면 주영은 몇 날 며칠 동안 그를 유령 취급했다. 그러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우혁이 자신의 잘못이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사과를 하겠다고 하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주영도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알겠다는 식으로 상황을 넘겼다. 실은 그때가 되면 주영 역시 정말로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것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함께 사는 동안 생활비는 각자 부담했다. 생활비라고 해봤자 월세와 관리비를 나눠 계산하는 식이었으니까. 식비는 우혁이 주영의 집에 놀러 올 때부터 굳어진 습관을 따랐다. 각자 만들어 먹거나 포장을 해오는 정도였는데, 배달 주문을 하기에는 다소 외지고 찾기 복잡한 곳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주로 우혁이 시내로 나가 맛집으로 불리는 곳에서 음식을 포장해 오기도 했다. 두 사람이 많은 시간을 보내기에 집은 좁지 않았다. 원룸이었지만 애초에 새롭게 무엇을 채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주영의 성격 때문에, 그리고 우혁은 짐이 별로 없었기에 더욱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주영은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일을 하느라, 우혁은 애초에 주영의 결정을 고분고분 따르는 편이었으므로 근처에 있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비교적 방세가 저렴했던 그 동네를 떠나지 않았다. 졸업한 후에는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다가구주택이 다닥다닥 모여 있는 곳으로 딱 두 번 정도 이사를 했다. 2년 전 우혁과 헤어지기 전까지 지냈던 투룸에서 다시 원룸으로 옮겨온 식이었다. 여기서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왜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어? 라고 묻는다면, 지금 와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주영은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그때는 아무리 머리를 맞대도 주영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어른이 없었으니까.

    학교에 다니는 내내 주영은 일을 했다. 평일에는 유동인구가 많은 터미널 인근 드러그스토어에서, 주말엔 유명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을 했으며 근처의 수선집에서 일감을 받아 남는 시간마다 우혁과 실과 바늘을 꿰어가며 머리핀에 붙일 리본을 만들었다. 간혹 들어오는 일이었지만 병원이나 제조사를 알 수 없는 화장품 같은 것을 인터넷에 홍보하기도 했다. 가식적인 게시물을 올리고 나면 서로 내용을 읽어주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각자의 허영을 우스워했다. 학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주로 일하는 시간에 맞춰 강의과목을 선택했으며, 방학이 시작되면 일하는 시간을 늘렸다. 때문에 듣고 싶었던 교양과목을 매년 놓치는 편이었는데 주영은 후에 그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드러그스토어에서 일을 하는 동안 한 달에 한 번 행사를 하는 날이 있으면 여름이고 겨울이고 할 것 없이 회사의 로고가 박힌 폴로셔츠, 그러니까 유니폼 하나만 걸친 채로 매장 입구 밖으로 나가 소형 확성기를 손에 들고 최대 사십 퍼센트까지 할인하는 품목을 차례로 읊었으며, 지나가는 행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들의 관계를 추측하거나 같잖은 유머를 내뱉기도 했다. 주영의 생일이 들어 있는 12월이면 드러그스토어는 문 앞에 크리스마스트리를 두고 더 큰 행사를 벌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주영은 조금 서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을 우혁에게 말할 수 없었다. 주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선의에서 우러나온 상대의 연민과 동정을 모멸감으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늘 상대의 마음을 짓이겨놓고 상황이 종료된 후에야 그것이 관심과 호의였다는 걸 깨닫고는 후회를 하는 사람.


    출근 준비를 할 때부터 주영은 내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주영에게 늘 치아의 통증은 두통과 함께 찾아왔다. 주영은 개찰구에서 병원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엔 충치가 분명한 것 같았다. 충치가 아니더라도 제 치아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회사로 가는 반대 방향의 열차 안에서 이동 중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피곤하고 무력하게 보였다. 모두 휴대전화에 고개를 박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쇼핑몰에서 생필품 초저가를 비교하는 중이었거나 지난 밤에 종료된 스포츠 경기 기사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주영 역시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을 열였다. 그리고는 검색창에 우혁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그것은 주영의 오랜 습관이었다.

    김우혁이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지만 주영이 찾는 우혁은 검색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김우혁과 금메달을 검색하면 약 20년 전의 인터넷 기사를 발견할 수 있다. 초등학생이었던 우혁이 사진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금메달을 손에 들고 있다. 제 키만 한 타월을 몸에 걸친 채로. 서울시에서 실시한 유소년 수영대회에서. 그건 우혁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쥐었던 승리이기도 했다. 처음 우혁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 후, 주영은 자주 그때의 마음에 대해 물었다. 우혁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어느 날엔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건 우혁이 주영에게 화를 내는 몇 안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주영은 이번엔 제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이 세상에 흔하고 흔한 이름. 주영의 이름을 검색해 보면 수많은 주영이 발견되었지만 주영이 검색하고 있는 주영은 없었다. 주영은 이번엔 이주영과 유화를 검색해 보았다. 그러면 몇 년 전에 어느 미술대전에서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확히 자신을 가리키는 기사가 검색되었지만 주영은 끝내 그 기사의 전문을 확인하지 않았다. 주영이 그림을 포기하게 된 것은 그 대회 때문이었으니까.

    의사는 주영을 보자마자 잘 지내고 있었느냐고 물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덕분에 주영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의사와는 주영이 처음 치료를 받기 시작했던 시점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는 주영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으로, 최근 주영이 이가 아프다고 말하며 병원을 자주 찾을 때마다 다른 직원들과는 다르게 한번도 지겨운 표정을 지은 적이 없다. 그렇지만 늘 치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단호하게 진단을 내렸다. 이가 아프다고 말하면 한 번쯤은 치아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의사는 늘 같은 말만 반복했다. 다른 의사에게도 진료를 받아 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의사가 조명을 주영의 머리 위로 올리자 주영이 입을 크게 벌렸다. 치경을 비롯한 몇 개의 날카로운 도구가 주영의 입을 차례로 훑는 동안 주영은 눈을 질끈 감고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긴장 푸세요. 아픈 거 하나도 없어요.

    의사는 차례대로 주영의 치아에 바람을 불어넣고, 얼음을 갖다 댔다. 그러면 이가 시려야 했지만 주영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의사는 주영의 표정을 살피다 잇몸 위에 올려놓은 얼음을 빼내고는 조명을 껐다. 푸른 패브릭 위로 얼음이 녹아 금세 얼룩을 만들어냈다. 의사는 다시 차트와 엑스레이를 번갈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환자분, 지난번에 신경과에서는 뭐라고 했었죠?

    ……괜찮다고 했어요. 이상 없다고.

    이가 어떻게 시린지 자세히 말해줄 수 있을까요?

    늘 똑같아요. 가만히 있어도 어금니 부근이 뻐근하고, 욱신거리고. 물이 닿으면 시린 것 같은 통증이 느껴져요. 그러다 보면 두통도 심해지고, 진통제를 먹으면 좀 괜찮아지긴 하는데, 어느 날엔 휘파람만 불어도 아픈 것 같아요. 최근에 제가 초콜릿을 좀 많이 먹었나 봐요.

    초콜릿 많이 먹어도 돼요. 사람이 달콤한 것도 좀 먹고 그래야지. 치아 관리만 잘하면 괜찮아요. 다만, 이번에도 충치가 있거나 신경에 염증이 생긴 건 아니에요. 환자분 치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야. 지난번에도 지금도.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주영의 물음에 의사는 장갑을 벗은 손으로 이마를 짚다 베드를 올려주었다.

    현재로서 방법은 두 가지인데요. 아무 문제 없는 어금니의 속을 판 뒤 억지로 신경을 죽여 인공치아를 씌우거나, 지금처럼 통증을 받아들이거나. 아픈 채로 내버려 두라는 말이 아니야.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해. 고통을 안고 살지 말아야지.

    결국 방법이 없다는 말이군요.

    주영은 실망한 표정으로 베드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 그러자 의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억지로 신경을 죽이는 치료를 권하고 싶지 않아요. 신경치료는 최악의 상황에만 하는 게 좋거든요. 그리고…….

    의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 안경을 고쳐 쓰고는 주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주영아, 뭐가 그렇게 힘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애쓰지 마라. 멀쩡한 이가 아플 정도로 힘든 거라면 그게 네 인생에 그렇게 중요한 건지 선생님은 잘 모르겠네.

    병원 로비에 있는 치아관리용품점에서 칫솔을 살펴보던 주영은 내내 의사가 매우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쉽게 충고를 해? 애쓰지 말라고? 여기서 어떻게 애쓰지 않을 수 있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어딘가는 망가지거나 통증이 생겼을 것이다. 주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샘플용 치간칫솔을 엄지손가락에 대고 힘을 주었다. 그러자 얇은 칫솔모는 손쉽게 구부러졌다. 주영은 망가진 치간칫솔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경사로를 따라 병원 정문으로 내려가는 길에 주영은 우혁을 처음 만났던 그 길을 떠올렸다. 푸른 잎의 나무가 우거진 길 위에서 우혁은 스포츠센터의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우혁은 그곳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수영을 가르치고 있었고, 동시에 주영과 같은 학교의 재학생이기도 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러 금세 몸에 습기가 차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그때의 우혁도 주영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너무 애쓰지 마. 세상에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건 아니야. 우혁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주영은 자신이 순진하거나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크게 화를 냈고 우혁은 주영을 설득하기 위해 몇 번 대화를 시도하다 결국엔 지치는 듯 포기를 했다. 두 사람이 헤어진 시점도 그즈음이었다. 주영이 미술대전의 최종 후보로 오르고 얼마 되지 않은 날, 두 사람이 살던 집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갈 무렵이었다.

    주영은 우혁과 비슷한 또래의 남성이 길거리에서 스포츠센터의 전단지를 나눠주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혁을 떠올렸다. 우혁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면 주영은 뜨거운 땡볕에 서서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전단지를 나눠주는 상대의 모습을 쉽게 외면할 수 없었다. 우혁과 헤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젠 우혁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인터넷 검색뿐인데도 주영은 종종 우혁을 생각했다. 곁에 있을 땐 몰랐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그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얼마만큼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주영은 스스로 사랑하는 것을 먼저 놓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떠나가는 감각은 역시나 낯설다, 하고 생각하고 있다.

    퇴근길에 주영은 평소와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 지하철역에서 15분만 평지를 걸으면 되는 지금의 집과는 달리 유난히 계단이 많고 경사가 높아 멀리서 보면 땅이 기울어진 모양의 동네였다. 주영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 하나를 바라보았다. 끝 집으로 앞과 옆에 각각 창문이 달린 방이었다. 주영은 그 집에서 우혁과 함께 여덟 번의 계절을 보냈다. 여름이 되면 유난히 햇빛이 강해서 임시방편으로 창문에 신문지를 겹겹이 붙여두었고, 겨울에 되면 생각했던 것보다 난방비가 높게 나와 옷은 세 겹을, 양말은 두 겹을 껴입고도 추위를 느꼈던 집이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그 집에 살 때만 해도 벽에 못을 박으면 큰돈을 물어내야 할까봐 커튼봉을 달 생각을 하지 못했고, 난방비를 조금 더 내고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것이 생활비 지출 중에 가장 큰 손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를 정도로 도와줄 가족이 주변에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없었어. 생각해 보면 그때는 자신이 어른스럽다고 여기며 일부러 아는 척을 했던 것들이 많았고, 혹여 어리다는 이유로 나쁜 일을 당하게 될까 봐 늦게 도착하더라도 늘 남보다 둘러가는 길을 택했다. 같은 조건이더라도 월세가 더 높은 쪽이 사기를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부엌 찬장 아래 곰팡이가 생기는 것이 세입자의 관리 소홀이라 생각해 집주인에게 불평하기보다 추운 날에도 자주 환기를 하는 편을 택했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그 집에서 스스로의 결정권을 조금씩 늘려갔으며, 때로는 부당하거나 억울한 일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법을 배웠다. 그러다 타인으로부터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느냐는 식의 질문을 받으면 그런 사정을 들키기 싫어 아무렇지 않은 척 고집스러운 표정만 지어 보였다.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알겠느냐고, 주영은 가끔 그 사람의 가슴팍을 밀치며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주영은 그러지 않았다. 허영이 가득한 사람처럼 고고하고 우아한 체를 하고 싶었으니까.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주영은 회사를 다니면서 그 집에서 계속 그림을 그렸다. 우혁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우혁이 외출을 한 사이에도 주영은 그 집에서 빈 공간마다 캔버스를 쌓아두었다. 새로운 가구를 들이거나 집을 꾸미는 일보다 흰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자신의 작품을 모아놓고 한 번씩 들여다보는 일이 주영에겐 몇 안 되는 큰 기쁨이었다. 주영이 처음부터 그것을 타인과의 경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주영은 자신의 몫을 지키기 위해선 언제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건 이미 학교와 일터에서 숱하게 경험했던 감각이었다. 학기 중 부정을 저지른 것이 탄로가 나 학생들로부터 보이콧을 당하고 있는 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동기들의 원성과 교수의 불순함이 끊이질 않았다. 더럽게 거머쥔 수석장학금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일터에 나가면 매니저로부터 맨손으로 드라이아이스를 집어야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다. 아이스크림이 주 메뉴였던 그 가게에선 포장시간 단축을 위해 장갑을 끼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그 바람에 엄지손가락을 여러 번 데였다. 그곳에선 3개월마다 직원을 무단으로 해고했다. 주영은 유일한 장기근속자였다. 동료들 사이에선 주영과 매니저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느니, 사람 비위를 참 잘 맞춘다느니하는 말이 쉬이 떠돌았다. 다른 곳에 가더라도 사람들은 마치 비슷한 플롯으로 짜여진 대본을 읽듯 진부한 역할을 맡았다. 이것을, 그러니까 이 순간들을 주영은 지금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며 습작을 했다. 물감을 짜고, 붓을 들었다. 물의 농도를 맞췄다. 반복했다. 또 반복했다. 다른 것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엔 붓을 잡는 쉬운 동작을 장시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손가락 마디를 다칠 수 있구나 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저 그렇게 살아버리는 것이다.

    처음 치아의 통증을 느끼게 된 것은 주영이 매 시즌마다 준비하던 미술대전의 최종 후보에 두 번째로 올랐을 때였다. 주영은 매년 생각했다. 만일 후보에라도 자신의 작품이 오르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고, 큰 힘이 될 것 같다고. 그러나 막상 그 상황이 닥치자 주영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정말로 그만두고 싶었다. 그때의 감정을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주영은 캔버스를 모두 망가뜨리고 싶었다. 어느 날부터 주영은 원을 그리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주말 아침이면 캔버스 앞에서 멍하니 벽을 바라보다 해가 지는 것을 무력하게 흘려보내야 했다. 사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스스로가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몇 달 이후 대회의 주최 측으로부터 연락받은 기획전 제안을 거절해야만 했다. 실력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림이라고 보기 어려운 낙서뿐이었다. 지금껏 노력해 나아간다는 사실, 현재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이렇게나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스스로가 징그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주영아, 어디가 아픈지 말을 해줘야 내가 뭐라도 도울 수 있지.


    2년 전, 보다 못한 우혁이 주영에게 물었을 때 주영은 입을 꾹 다문 채 한쪽 벽면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비스듬하게 베고 있던 머리 위로 마시고 남은 물과 반쯤 삐져나온 약봉지가 놓여 있었다. 약이라고 해봐야 또 약국에서 사 온 진통제가 분명했다. 부쩍 진통제를 많이 찾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우혁은 주영에게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짐작했다. 좋은 일도, 그렇지 않은 일도 모두 주영에게 털어놓는 우혁에 비해 주영은 마음을 잠궈두는 편이었다. 과거의 일에 대해 조금만 깊이 파고들거나 혼자서 감당하기에 어렵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우혁이 아닌 진통제에 의지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 날이면 유독 정리에 대한 강박이 심해졌으며, 평소보다 일찍 이부자리에 누워 잠을 잤다. 그러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우혁은 주영이 외향적이라거나 밝은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알고 보면 사소한 일일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 주영은 지나치게 예민하게 구는 면이 있었고, 이번에도 그런 이유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거라면 해결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미 몇 해 동안 주영이 감추듯 입을 다무는 영역에 대해 애써 우혁이 파고들기 시작하면 주영과 크게 다툼이 벌어졌고, 끝내 무엇도 바꾸지 못한 채 우혁이 사과를 하는 식으로 상황이 종료되었다. 반복됐다. 또 반복됐다. 우혁은 그런 주영을 이해할 수 없었고, 언젠가부터 일련의 과정들에 지치기 시작했다.

    우혁은 답답한 듯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다 주영을 바라보았다. 주영이 누워 있는 실루엣 위로 눈에 띄게 덧칠되어 있는 캔버스가 들어왔다. 팔레트 위에 손톱만 한 크기로 짜여져 있던 물감은 굳은 지 한참이 지난 것 같았다. 그제서야 우혁은 집 안에 주영의 그림이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혁은 이젤 앞으로 가 그리다 만 캔버스의 표면을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추상화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그림이라기보다는 물감을 덜어낸 팔레트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너 이거 때문에 그래? 올해도 여기 떨어져서? 그때부터 이러고 있잖아.

    이가 좀 아파서 그런 거야.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내 개인적인 문제야.

    그럼 바로 병원을 가지, 답답하게 왜 약만 먹고 있어?

    문제가 없대.

    문제가 없는데 왜 진통제를 계속 먹어?

    아프니까.

    왜 아픈데?

    너 오늘 게임 같은 거 안 하니?

    주영아.

    아님 나가서 친구들 좀 만나.

    주영아, 너 이럴 거면 다 그만둬. 그게 뭐라고 그렇게 속상해하는 거야? 누군 너처럼 열심히 안 해 본 줄 알아? 그리고 그게 우리가 먹고사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어? 네가 노력하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네 인생에 뭐가 도움이 되는 건지 널 오래 지켜본 나는 하나도 모르겠어. 적당히 해. 적당히. 너 그러다 크게 다칠 것 같아.

    우혁. 알았으니까 그만 얘기하자.

    너무 애쓰지 말란 소리야. 세상에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우혁의 말에 주영이 머리끝까지 끌어당기던 이불을 걷고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는 우혁의 뒤통수에 대고 그럼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우혁이 들고 있던 물컵을 탁하고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이에 주영은 지지 않고 목 끝까지 빨개진 채로 숨을 삼키고는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나는 한 가지밖에 없어. 다른 방법을 알려줄 사람도 내 곁엔 아무도 없어. 답도 없는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정직하게 노력해온 것에 대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이게 전부야. 그러니까 내가 네 선택에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처럼 너도 내 인생에 참견하지도, 함부로 말하지도 마. 사람은 다 달라. 세상에는 너무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 내가 견뎌 온 세상은 주목받지 못하거나 애쓰지 않으면 변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서 네 말이 틀렸다는 것도 아니고, 네가 나쁜 사람이라는 말도 아니야. 만약에 네가 선수 생활을 포기하던 때로 돌아간다면 방금 그 말, 똑같이 할 수 있어? 아니잖아. 너도 마음이 미쳐버릴 것 같잖아.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거 아니야. 나는 그냥, 세상에는 나 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이해받고 싶은 것뿐이야. 이게 지금의 나야.

    주영은 그 말을 뱉고서도 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입술을 달싹이며 우혁을 쏘아보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엉엉 울다 이불을 걷어차고는 제 앞에 놓인 이젤을 넘어뜨렸다. 이젤은 단 한 번의 저항도 없이 너무나 쉽게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그래, 그만두자. 여기서 나만 그만두면 모든 게 괜찮아지겠지.

    우혁은 주영이 저를 노려보는 눈빛이 낯설게 느껴졌다. 함께 지내는 동안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분노의 방향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우혁은 당황한 표정으로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언성을 높였고, 그 길로 집을 나가 며칠 동안 주영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혁과는 사소한 것을 이유로 헤어졌던 것 같다고 주영은 생각하고 있다. 샴푸였나 바디워시였나. 평소 물건을 쓰고 나면 제자리에 두거나 뚜껑을 닫지 않는 그 습관 때문에 시작된 싸움은 서로가 마음에 묻고 있었던 상처를 건드렸고, 어느새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해야 더 상처줄 수 있는지를 알아낸 두 사람은 나빠진 사이를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크게 틀어졌다. 투룸 재계약을 앞두고 먼저 헤어지자고 말한 쪽은 우혁이었고, 두 사람은 끝내 그날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주영은 이삿날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때 세운 자존심이 자신이 고고하게 굴었던 것 중에 앞으로 살면서 후회를 가장 많이 하게 될 것임을, 비로소.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주영은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물건 중에 대부분을 버렸다. 낡은 프라이팬이나 모서리가 깨진 거울, 오래전에 사두고 쓰지 않았던 립스틱 같은 것들이었는데 그중에 우혁이 버리고 간 수경과 수모를 챙겨 이젤 위에 걸어두었다. 자주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그것들은 주영의 집 어딘가에 공간을 차지하게 되었다. 새집에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아침이 되자 주영은 여전히 치아의 통증이 일상의 불편함을 가져올 만큼 심해졌다고 느꼈다. 이번엔 다른 병원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에 찾아간 회사 근처의 병원에서 주영은 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인터넷에 자신과 같은 증상을 겪는 사람들의 사례를 찾아보았다. 그렇지만 어디에도 주영과 같은 통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보이지 않았다. 주영은 이번엔 우혁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늘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할 우혁의 기사는 제목만 남은 채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일시적인 오류인지, 오래전의 기사이기에 사이트가 만료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주영은 조금 인상을 썼고, 언젠가 자신의 이야기도 잊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의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주영의 이름이 불렸고, 늘 그랬던 것처럼 엑스레이 촬영을 비롯한 기본적인 검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진행했다.

    환자분, 치료받을 치아는 없어 보이는데요. 혹시 큰 병원은 가보셨나요?

    머리에 돋보기를 쓴 의사는 젊은 여자였고, 어쩌면 주영 또래로 보일지도 몰랐다. 그 의사는 주영이 지금까지 숱하게 들어왔던 진단과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말했고, 의사의 말이 끝나갈수록 주영의 얼굴은 조금씩 구겨졌다. 결국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말에 주영은 조금 화가 났다.

    선생님, 제가 아프다니까요. 제가 통증을 느끼고 있다니까요. 저는 내내 아프다고 말해왔는데, 왜 다들 내가 괜찮다고 그래요. 혹시나 잘 보이지 않는 어딘가가 썩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왜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고 다들 그렇게 쉽게 말해버려요.

    의사는 주영의 말에 엑스레이를 더 들여다보더니 진단은 더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대학병원에 가보는 건 어떻겠냐는 말도 덧붙였다. 이미 다녀왔고, 그간 자신이 받아온 진단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자 의사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환자분이 선택하셔야죠. 저희도 이제 점심시간이라서요.

    의사의 말에 주영은 조금 전까지 일그러뜨리던 얼굴의 힘을 조금씩 풀며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병원 프런트 앞에는 배달 직원이 서 있었고 그는 곧 가방에서 프랜차이즈 피자를 한 판 꺼내 올려놓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곧 진료실 안에 기름 냄새가 퍼졌고, 주영은 허기를 느끼며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세상이 0과 1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주영은 그 사람의 마음을 힘껏 괴롭혀 주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오히려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괴로운 마음이 드는 쪽은 주영이었다.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를 꽂고 살아가는 기분. 몸의 구멍마다 얇고 긴 바늘이 꽂혀 있는 것 같은 느낌. 움직이는 자리마다 통증이 생겼던 이유는 오래전부터 견디고 있었던 괴로움일지도 모르고,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언제고 그녀가 겪어야 하는 어려움일지도 몰랐다. 세상에는 2도 있고, 3도 있고, 애초에 수라는 것은 무한대로 예상치 못하게 탄생한다는 것을 주영이 모를 리 없었다. 사실은 지나온 시간들이 주영 스스로 그것을 깨닫게 해주었으니까. 그때 의사와 우혁이 건넸던 말들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그것을 모른 채 시간을 견디고 있는 이들이 멀지 않은 곳에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세상은 0과 1로만 나누어지는 것이 맞다고 바락바락 우기고 싶었다. 그때의 상처를 어떻게든 이해받고 싶었다.

    왜 그때 나는 모든 것을 어렵게만 생각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칠 때면 주영은 마음이 아주 서러워졌고, 어느 밤엔 제 그림자가 덮이는 벽면의 모서리에 기대어 오래 울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어느 날엔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을 발견할 때면 그것을 너무도 쉽게 성장통이라 치부하기도 했는데, 그걸 인정할수록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별로인 사람으로 느껴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영은 베란다에서 캔버스를 천천히 꺼냈다. 덧칠된 물감으로 표면이 두꺼워진 그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밉게만 보였다.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더 이상 방치할 필요도 없었다. 주영은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었다. 이젤을 방 안으로 들일 수도 있었고, 새로운 캔버스지로 교체할 수도 있었다. 이제 그것들을 모두 버린다고 해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주영은 캔버스지와 목판의 표면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한자리에 놓여 있었던 것들은 건드릴수록 옅게 먼지가 일었다.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던 나사는 분리되기까지 생각보다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렇지만 주영은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제 손으로 씩씩하게 그것을 버리고 싶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대신 얻어낸 건 무너지지 않고 꿋꿋하게 서 있을 수 있었던 두 다리니까. 불필요한 짐을 모두 비워냈을 땐 어느덧 시간은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영은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로 되돌아왔다.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오직 진통제만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주영은 그날 그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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