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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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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조성철 경남종합사회복지관장

“소외된 아이들 ‘왕자와 공주’로 대하면 웃음꽃 피어나요”

  • 기사입력 : 2010-02-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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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성철 경남종합사회복지관장이 인애원 내의 아들 딸들과 손을 잡고 걸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 /전강용기자/

    # 버려진 아기, 어머니를 만나다

    채 열흘이나 됐을까. 휑한 고아원 문앞. 빨간 핏덩이 하나가 누더기에 싸여 힘겹게 칭얼거리고 있었다. 오늘밤이나 넘길 수 있을까. 한쪽 구석으로 밀쳐놓았다. 아침에 마주친 아기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였다. 당장 죽으라는 운명은 아닌가 보다. 아주머니들의 젖을 번갈아 빨고, 멀건 죽도 악착같이 넘기더니 제법 사람 꼴이 나기 시작했다.

    조성철(58) 경남종합사회복지관장이 떠올릴 수 있는 출생에 대한 기억은 아쉽게도 여기까지다. 이마저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을 짜깁기한 것이다. 틀린 것도 있을 터고, 맞는 말도 있겠지만 그냥 그대로 알고 있을 수밖에.

    하지만 조 관장은 처량하고도 짧은 출생의 기억을 전해준 인애원과의 만남을 ‘더 없는 축복이다’고 말했다. 단지 주린 배를 채우고, 찬바람을 피하고,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 것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주고 삶의 지침이 된 당시 인애원 원장이었던 조수옥(2002년 작고) 여사를 만났기 때문이다.

    조수옥 여사는 조 관장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출생기록이 없는 조 관장을 자신의 슬하에 거두고 고향도 선물했다.

    조 관장은 “어머니에게 인내와 자립,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을 배웠다. 강요하지 않고 당신이 몸소 보였다”며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결국 내 인생의 자양분이 됐다”고 말했다.

    인애원은 지난 46년 조수옥 여사가 마산시 장군동에 설립했다. 해방과 전쟁으로 피폐했던 시절 부모를 잃고 또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들을 돌보던 시설이다.

    누구 하나 도움을 주지 않던 시절. 인애원도 자립의 길을 걸어야 했고 때문에 원생들은 직접 밭을 일구고, 소를 키우고, 일을 해야만 했다.

    조 관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책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일터로 나가야 했다.

    조 관장은 “일도 힘들었지만 이보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고아’라는 또래들의 놀림이었다”고 회상했다.

    # 방황, 그리고 깨우치다

    11살. 초등학교 4학년 때 드디어 사고(?)를 쳤다. 일도 싫고 ‘고아’라는 말은 더 싫었다. 원생 한 명과 화물열차에 몰래 올라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내린 곳은 부산. 인애원 출신 형을 만났지만 실컷 꾸중만 들었다.

    이왕 나온 것. 돌아가 처벌받을 것도 두려웠다(당시는 가출 등 고아원 생활규칙을 어기면 형들이 사형(私刑)을 가하던 나름의 내규가 있었다).

    부산역 주변 불량배들에게 잡혀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밥도 배불리 먹고,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됐다. 3개월이 지났을 즈음 불현듯 자신을 되돌아봤다. 나쁜짓 하면서 배부른 것에 만족하며 사는 모습에 화가 치밀었고 인애원이 떠올랐다.

    조 관장은 “갑자기 인애원의 새벽기도 시간이 그리웠다. 아마도 종교에 대한 어머니의 가르침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 새벽, 조 관장은 문 밖에서 어머니의 기도를 들었다.

    “여기 있는 어린이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로 비칠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왕자이고 공주입니다.”

    조 관장은 자신이 귀한 존재라는 것을 이때 깨우쳤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훔치며.

    다시 돌아온 인애원. 여전히 힘든 생활이었지만 조 관장은 이제 어린애가 아니었다.

    조 관장은 “힘들 때마다 ‘나는 왕자다’를 되뇌었다. 비록 옷은 남루하고 배는 고팠지만 언젠가 제대로 된 사람 노릇을 할 것이라고 수도 없이 다짐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됐다. 곧 인애원을 떠나야 할 시간이다(당시는 고교를 졸업하면 고아원을 떠나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고 한다). 불안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지만, 희망을 접하기는 어려웠다.

    먼저 인애원을 나간 형들에게 연락할 수밖에. 다행히 고아원에서 배운 기술을 밑천으로 부산 인근의 목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배고픔에 대한 한(恨) 때문일까. 버는 족족 먹고 마시기 바빴다. 미래는 고사하고 내일조차 없었다.

    자갈치 시장 할머니들에게서 어머니를 떠올렸을까. 2년간의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고 마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두 번째 귀향이 지금의 그를 있게 한다.

    # 지역복지사업에 뛰어들다

    조 관장은 셈에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산에서 계리(지금의 세무사) 일을 했다. 수완이 좋아서인지 돈도 제법 잘 벌었다.

    어머니에게 자랑도 할 겸 당시로서는 귀했던 바나나를 한 아름 사들고 갔다. 어머니는 칭찬은커녕 바나나를 내동댕이쳤다.

    “세상을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인애원 들어와 허드렛일이나 하라”며.

    80년대 초반쯤으로 그때부터 조 관장은 인애원 생활지도원을 맡았다. 나름대로 세상사에 자신감을 가졌던 그로서는 복지사업에 대해 비뚤어진 사회적 편견이 못마땅했다.

    자신이 생각할 때는 사회복지의 중요성에 비춰 종사자나 시설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터무니없이 싸늘했다.

    조 관장은 “고아원 운영에 머물 것이 아니라 사회복지에 직접 참여해 개혁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며 “복지는 시설과 사회가 책임을 분담해야 된다는 생각에 이를 위한 인적 네트워크 구성과 자원교육에 눈을 돌리게 됐다”고 말했다.

    83년 개정된 사회복지사업법은 조 관장의 꿈에 날개를 달아줬다.

    지역마다 지역복지센터가 문을 열었고, 87년 마산시 구암동에 경남종합사회복지관을 건립했다.

    조 관장은 “어머니에게는 복지가 제대로 되려면 교육을 통한 인적 자원의 육성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죠. 어머니도 평소에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흔쾌히 허락하고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조 관장은 경남종합사회복지관을 교육센터로, 또 지역 내 인적 네크워크를 확대해 가는 사회복지사업의 메카로 육성시키며 한편으론 복지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조성철 관장이 인애원 내 아들 딸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전강용기자/

    # 한국복지사업의 선두에 서다

    조 관장은 지난해 3월 한국사회복지사협회장에 취임했다. 경남회장을 맡고 있을 때다. 우연찮게 찾아온 기회였지만 제대로 된 복지 시스템을 갈구하던 그로서는 더없는 기회였다,

    조 관장은 “우리나라 경제규모는 이제 복지사를 적극 활용할 단계에 왔다. 만약 국가가 빈곤층 지원에 직접 나선다면 국민은 나태해지고 사회적 빈곤은 악순환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복지사들도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역할에 벗어나 복지사업의 주체로서 나서야 한다. 끊임없이 일을 만들고 아이디어를 내는 이벤트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사회복지사가 제 역할을 하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진정한 복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조 관장이 역점사업으로 추진 중인 공제회 기금조성과 처우 개선책 등이 이를 위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조 관장은 여기서 한발 나아가 ‘사회복지 정치참여 네트워크’를 지난해 11월 출범시켰다.

    추진단 상임대표인 그는 “사회복지사가 지방정치에 직접 참가해 정책을 만드는 주체가 되자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복지권을 획득하게 하고 권리를 찾아줘 행복하고 희망의 삶을 살게하는 것이 사회복지사의 역할이자 책무이기 때문이다”고 출범 배경을 설명했다.

    조 관장은 현재 국무총리실 중앙사회보장위원회 위원, 보건복지가족부 자살예방대책추진위원회 위원, 행정안전부 자원봉사진흥위원회 위원, 통일부 북한이탈주민후원회 이사 등으로 활약하며 사회복지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어머니

    조 관장은 적어도 국내 복지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정점(頂點)에 오른 것이다. 한국사회복지사협회장을 맡았을 때 그는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감투욕은 아니다.

    고아원 앞에 버려졌던 핏덩이가, 싸늘한 시선 속에 주린 배를 채우기 급급했던 한 소년이, 꿈도 없이 방황했던 한 청년이, 이제 이들을 다독거리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왔기 때문이다.

    조 관장은 “복지는 아는 사람이 희생을 해야 된다. 복지라는 게 생활과 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삶이 곧 복지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힘들고 쓰라린 과거를 가진 그로서는 참으로 ‘딱’인 것이다.

    조 관장은 복지관을 드나들 때마다 인애원을 올려다본다. 그 속에서 매번 어머니를 만난다.

    집 나간 11살짜리 탕자(蕩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어머니의 새벽기도. “… 모두가 왕자이고 공주입니다.”

    조 관장은 그의 길을 걷게 하고 또 이끌고 있는 어머니의 기도를 떠올리며, 복지사회를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문재기자 mj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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