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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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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의 저녁- 박은주

  • 기사입력 : 2010-12-2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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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파트 후문 트럭가게로

    꿀빵 달라며 사내아이가 뛰어든다

    호떡을 굽던 여자가

    눈과 입꼬리로 대답을 건네는

    묵음의 단내 환한 저녁 모퉁이에

    자전거 한 대, 꼬꾸라진 채로 바퀴를 굴리고 있다

    가방은 가방대로

    철제바구니는 그것대로 나동그라진 저만치

    여자가 탱탱한 악다구니를 뭉쳐

    소년의 귓바퀴에 쑤셔 넣는다

    폭설(暴舌) 때문에 스멀거리는 어둠 속에서, 말은

    어둠 때문에 한껏 고요하게 번득인다

    주억거리는 ‘바퀴도둑’의 달팽이관을 깨뜨린 말은

    날렵하고 뾰족한 혀끝에서 자체 증식 중이다

    뭉글대며 부풀다 문드러지는 말들의 고름

    삽시간에 빛의 진원지마다 뻑뻑한 원액을 배달해 놓는다

     

    꿀빵으로 그의 입 안을

    달근하게 메우고 싶은 폭설(暴說)의 저녁

    손말을 하는 그녀에게 자전거 바퀴처럼

    윤이 나는 음표 몇 개 훔쳐다 주고 싶은 이 저녁,

    눈 없이도 폭설의 자국은 깊고 짙다

    -박은주, ‘폭설의 저녁’ 전문(‘경남문학’ 봄호, 2010)

    ☞ 유년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르고 한 편의 안타까운 동화가 들립니다. 손말을 하며 호떡을 구워 파는 따뜻한 김이 나는 입을 가진 여자와 날렵하고 뾰족한 혀에서 난폭한 악다구니들이 고름처럼 뚝뚝 떨어지는 입을 가진 여자 사이에 자전거를 훔친 사내아이가 있습니다. 한 여자의 일방적인 말에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 정지한 듯합니다.

    아이의 고픈 뱃속과 허기진 귓속으로 난폭한 혀[暴舌]에서 쏟아진 말들이 탄환처럼 날아가 박힙니다. 호떡 굽는 여자의 환한 눈과 입꼬리 속에도 날아가 꽂힙니다. 호떡의 맛과 향기가 모락모락 풍기는 저녁 풍경 쪽으로 난폭한 말[暴說]의 피와 고름이 흘러들어 주변의 이목구비를 다 적십니다. 눈[雪]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폭폭 밟고 지나간 자국 깊고 짙습니다.

    하얀 눈으로 그 자국을 씻어주고 달근한 꿀로 속을 채워주려는 시인의 언어들이 정지해 있는 풍경을 다시 가동시키고 있습니다. 이 땅을 이끌고 가는 힘 하나를 봅니다. -최석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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