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5월 06일 (월)
전체메뉴

[세상을 보며] 느림 또는 빠름- 강태구(부국장대우 사회2부장)

  • 기사입력 : 2014-03-06 11:00:00
  •   



  • ‘빨리빨리’의 대명사 대한민국, 한국인에게 언제부터인지 ‘느리게’ 또는 ‘느림’이 화두(話頭)처럼 등장했다.

    경제 급성장기인 70~80년대, 초가집도 고치고 마을길도 넓히는 새마을운동 시대, 상품도 빨리 만들어서 외국에 팔아야 하는 수출제일주의 시대에 빠른 것은 선(善)이었고 느린 건 게으름의 상징인 양 악(惡)이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나는 가을운동회가 한편으로는 좋았지만 또 한편으론 무척 싫었다. 좋은 이유는 평상시 자주 먹지 못하는 김밥에 삶은 계란, 밤, 땅콩 등을 어머니가 싸 와서이고, 싫은 이유는 달리기 경기 때문이다. 같은 반 친구 6~7명이 뛰면 매번 뒤에서 순위를 세는 게 빨랐다. 6년 내내 3등이 최고 성적이었다. 그것도 앞서 가던 친구들이 넘어진 덕분으로, 얼마 전 막을 내린 소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에서 이런 일이 종종 벌어져 그때를 떠올리곤 했다.

    빨리 가기인 달리기 열풍이 시작된 시기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따면서부터이다. 전국적으로 마라톤 열풍이 확산된 것은 아마도 1997년 11월 외환위기 사태 이후일 것이다. 졸지에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처자식 안 굶기려면 내 몸이라도 건강해야 했다. 실직한 가장의 아린 마음이었을까.

    느림과 빠름, 그 자체가 무슨 선이 되고 악이 되랴만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햄버거, 피자, 치킨으로 대변되는 패스트푸드. 이런 음식은 먹기 간편하고 빨리 먹고 빨리 일해야 하던 시대에는 선(善)일 수도 있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에 접어들자 느린 음식, 슬로푸드가 세인에게 각광받자 전국 지자체들은 덩달아 삶의 질 향상에 초점을 둔 슬로시티를 표방하고 있다.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 천천히 걷는 것이 좋은 것이며 느린 게 미학이라고.

    사실 슬로푸드는 40대 이상이면 어릴 때부터 늘 먹어 오던 음식이다. 우리나라 슬로푸드의 대표주자로 김치와 장·젓갈류를 꼽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여기에 데치고 무치는 나물류도 빠질 수 없다. 겉절이 김치나 청국장처럼 바로 조리해서 먹거나 숙성기간이 짧은 것도 있지만 세 종류 모두 긴 숙성기간과 발효과정을 거쳐야 제맛을 낸다. 우리나라 사람은 어릴 때부터 김치, 된장 등 곰삭은 발효음식에 길들여져 외국여행 때 음식고생을 심하게 하기도 한다.

    발효음식은 한 번 맛들이면 ‘헤어날 수 없는 중독성’이 있다. 이 맛을 유럽이나 미주에 수출하는 데 주력했으면 한다. 이젠 자동차, 가전품 등 하드웨어보다 음식, 음악 등 문화라는 소프트웨어가 수출 효자 종목이다.

    슬로푸드와 패스트푸드, 어떤 음식을 주로 먹느냐가 미국에서 부자와 빈자의 척도가 된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이 패스트푸드를 많이 먹는데, 이런 음식은 열량이 높아 살이 찌게 마련이다. 그래서 ‘비만 = 가난’ 등식이 성립된다고.

    ‘느림의 시대’가 도래하자 이번엔 걷기 열풍이 일어났다. 둘레길, 숲속길, 갈매길 등 이름은 지자체마다 다르지만 산이나 바다를 낀 걷는 길을 앞다퉈 개설했다. 뛰어 가면 안 보이는 것도 걸으면 잘 보이니 환영할 만한 일로 박수를 보낸다.

    지난달 26일 서울에서 세 모녀 자살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마음 한편이 참 허허하다. 오늘은 개구리가 봄기운에 놀라 깨어난다는 경칩이다. 매화가 만개했으니 봄이 분명 왔건만 우리 사회 한구석에는 아직도 한겨울 삭풍이 몰아치고 있는 느낌이다.

    박근혜정부가 최근 ‘474비전’(잠재성장률 4%, 고용률 70%, 국민소득 4만 달러)을 제시한 지금, 대한민국 하늘 아래 어떤 가정은 아직도 ‘밥’을 걱정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경제 급성장기에는 앞만 보고 내달렸고, 풍요의 시대에는 느림만 즐겼지 앞뒤를 살피지 못한 건 아닐까. 이젠 더 천천히, 느리게 걷자. 전후좌우도 살펴가면서.

    강태구 부국장대우 사회2부장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