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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6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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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보내온 편지] (1) 최치원의 생애

천년을 앞서간 천재 학자, 경남을 다시 거닐다
12살 때 당나라 유학길 올라
18세 때 빈공과에 장원 합격

  • 기사입력 : 2016-03-0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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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시 원동면 오봉산 자락 임경대 너럭바위. 최치원은 ‘황산강 임경대’라는 시를 남겼다./경남신문DB/


    각고의 투쟁 끝에 우리나라에도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는 민주주의가 도래했다. 헌법에 차별을 금지한다는 규정도 마련해뒀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을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는 현 시대에도 보이지 않는 계급별 차이가 때로는 발목을 잡기도 한다. 하물며 신분제가 명시적으로 존재했던 과거에는 과연 그 장벽이 얼마나 견고했을지.

    지금으로부터 1000여년 전 통일신라 말기 글로벌 유학파이자, 문장가이며 목민관이자 사회개혁자였던 ‘고운 최치원’도 신분의 한계에 부딪힌 안타까운 인재였다. 그는 나라 안팎의 혼탁하고 정치적으로 위태로웠던 시기에 국가를 유지하는 기본적 자산인 백성들의 생명과 삶의 의지를 지키고자 당나라에서 습득한 지식과 지혜로 변화의 의지를 불태운 인물이었다.

    또 신라와 당의 유교와 불교, 도교를 모두 이해한 사상가였던 그는 귀국 후 신라의 ‘풍류’를 중심으로 유(儒)-불(佛)-도(道) 3교의 사상적 융합을 꾀한 선지자였으며, 한국 한문학의 조종(祖宗)이라 불리며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글을 남긴 뛰어난 문장가였다.

    전국을 순례한 그는 경남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함양에서는 마지막 관직 생활을 했고, 창원에서는 집을 지어놓고 한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그는 가족과 함께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간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본지는 경남대 고운학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경남에 남아 있는 최치원의 흔적을 더듬어보려 한다. 도내 곳곳에 분명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그의 발자취를 통해 그가 얼마나 민족과 나라를 위해 살았는지, 우리에게 어떤 삶의 교훈을 남겼는지를 살펴보고자 함이다.

    첫번째 순서로 ‘최치원의 생애’를 통해 왜 경남에서 그를 재조명해야 하는지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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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두 살 때 당나라로 떠난 천재=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이었다.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아찬(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까지 벼슬에 오를 수 없었다. 골품제라는 한계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던 6두품들은 대안으로 당나라행을 많이 택했는데, 최치원도 그의 나이 열두 살 때 유학길에 올랐다.

    먼 길을 떠나는 그에게 아버지는 “10년 공부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아들이 아니다”고 했다. 유학을 떠나는 최치원의 각오도 이에 못지않았다.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 끝을 천장에 매달고 바늘로 다리를 찔러가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6년 만인 874년, 그의 나이 18세 때 빈공과에 장원으로 합격했다.

    빈공과는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으로 여기에 합격하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귀국 후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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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 마산합포구 해운동에 있는 ‘월영대’.

    ◆‘토황소격문’으로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치다= 최치원은 과거에 합격한 2년 뒤인 876년 당나라 선주(宣州) 율수현의 현위(종9품)로 첫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직했고, 이후 회남 절도사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라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 무렵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한 ‘황소의 난’이 일어났고,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며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최치원은 이때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니 네가 비록 숨은 붙어 있다고는 하지만 넋은 이미 빠졌을 것이다”라며 ‘토황소격문’을 썼다.

    이 글을 읽은 황소가 너무 놀라 침상 아래로 굴러떨어졌다는 일화가 유명했으며,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닌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 정도로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황소의 난이 진압되자 중국 황제는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자금어대를 최치원에게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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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 가야산 홍류동 계곡의 ‘농산정’.

    ◆하지만 여전히 높은 ‘신분의 벽’=고국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최치원은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귀국을 결심했다. 왕권을 강화하려던 신라의 헌강왕은 귀국한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로 임명해 곁에 뒀다. 최치원도 당나라에서 배운 학문과 기량을 고국에서 제대로 펼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듬해 헌강왕이 승하하자 이미 진골 귀족들의 눈밖에 난 최치원은 외직인 태산군(현 전북 태안) 태수가 됐다.

    이후 부성군(현 충남 서산), 천령군(현 함양) 태수를 지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신라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894년에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려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안했고, 진성여왕은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해 그의 제안에 따라 개혁을 펼치려 했지만 중앙 귀족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한계가, 고국에서는 6두품이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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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 쌍계사의 ‘최치원 쌍계석문’.

    ◆관직을 내던지고 자연 속으로= 이미 멸망의 길로 들어선 신라왕실에 좌절감을 느낀 최치원은 관직을 버리고 전국 곳곳을 돌며 저술활동과 후학교육에 힘썼다. 그의 행적이 전해지는 곳은 다양하다. 이 중에서도 경남에서의 삶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운동 월영대(月影臺)는 최치원이 여러 지역을 유랑하다 만년에 후학을 가르치며 시문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곳들 중 하나다.

    최치원은 이곳에다 ‘별서(別墅)’라는 집을 짓고 가족들이 함께 옮겨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스쳐 지나갔던 다른 지역과는 달리 거처를 두고 한동안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마지막 안식처인 가야산을 제외하고 ‘합포현 별서’가 유일하다. 2년간의 합포현 별서 생활 후 898년 최치원은 가족과 함께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갔다. 이후 최치원의 행방은 알 길이 없다. 홍류동 계곡에는 ‘고운이 이곳에서 노년을 지내다 갓과 신발만 남겨둔 채 홀연히 신선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질 뿐이다.

    이 외에도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지 3년 만에 직접 문장을 짓고 쓴 유일한 비문인 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가 남아 있고, 양산 물금의 낙동강 임경대(臨景臺)는 최치원이 주유하다 시문을 남긴 곳이라 전해진다. 또 사천의 남일대는 최치원이 그곳 경치에 반해 ‘남녘에서 가장 빼어난 절경’이라 해 붙여진 지명이다. 이외에도 명확히 확인되는 주요 유적지만 수십 곳에 달하는 등 인생의 후반부를 보낸 경남에는 최치원의 흔적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남아 있다.

    김언진 기자 hope@knnews.co.kr


    ◆최치원(崔致遠: 857~?)은


    857년(1세) 경북 경주(경남 창원,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

    868년(12세) 관비(官費)로 당나라 서경(장안)으로 건너가 국자감(國子監)에서 유학.

    874년(18세)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

    876년(20세)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선주(宣州)관할 율수현위가 돼 관계(官界)에 진출.

    880년(24세)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됨.

    881년(25세) 황소의 난이 일자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돼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음.

    883년(27세)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펴냄.

    885년(29세) 당나라 생활을 접고 귀국. 헌강왕으로부터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에 임명(외교문서 등 작성).

    886년(30세) 전북 정읍 칠보면 일대 태수 임명.

    887년(31세)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명 완성.

    894년(38세) 천령군(현 함양) 태수 부임. 진성여왕에게 개혁안인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림.

    896년(40세) 여러 지역 유람하다 합포현 별서(현 창원 마산합포구)에 머묾.

    898년(42세)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

    909년(53세)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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