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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7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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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김복득 95세 최고령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다시 태어나면 신랑 만나 아이 낳고 살고 싶어"

  • 기사입력 : 2012-06-12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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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년째 김복득 할머니와 딸처럼 지내고 있는 송도자 통영거제시민모임 대표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그림을 보며 설명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가스나 몸이데이.”

    할머니는 었다. 입꼬리를 따라 주름이 깊게 패었고, 눈가는 불그스레 물들었다.

    김복득(95)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타국에서 7년을 살았다.

    '가스나'는 그 주홍글씨로 당신 호적상에 평생 미혼일 수밖에 없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소녀, 한국에서 사라지다

    1937년 5월 어느 날 통영, 댕기머리를 땋은 소녀는 그물공장이 쉬는 날을 맞아 거제 고모댁에 놀러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나이는 열여덟, 눈빛이 반짝거리고, 또 금세 볼이 발개지는 곱고 여린 소녀였다. 소녀가 강구안(통영터미널 인근)을 지날 때, 한 이웃 아저씨가 말을 걸어 왔다. 그는 소녀에게 “돈을 아주 많이 주는 큰 공장이 있는데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공장에 다니며 홀어머니와 남동생을 부양하던 소녀는 큰돈이 되는 일자리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작은 어촌 마을, 이웃 아저씨의 호의를 의심할 만한 영악함은 소녀에게 없었다. 그렇게 ‘잠시만’하고 따라나섰던 길이 ‘지옥길’이었음도 알 리가 없었다. 소녀를 인적 드문 곳으로 이끈 일행은 소녀를 강제로 배에 태웠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부산을 거쳐 기차를 타고 중국, 대만을 거쳐 필리핀에 도착한 소녀는 나무로 만든 판자집 앞으로 끌려 왔다.

    그리고 그들은 소녀를 작은 방에 밀어넣고 “손님을 받아라”고 했다. 그곳은 일본군인들의 성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위안소였다.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손님을 받아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많이 울었죠.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거죠. 얼마나 똑똑하고 눈치도 빠른 아이였는데, 그 시절 촌에서 그런 일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7년의 지옥, 죽지 못해 살았다

    소녀에게는 ‘후미코’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그들이 말한 ‘손님’, 일본군인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소녀는 작은 몸으로 한 평 남짓한 방에서 하루 많게는 19명에서 적게는 10명의 일본군을 받아야 했다. 아래쪽의 통증은 늘 그녀를 괴롭혔다, 아파도 쉴 수 없었고, 밤낮도 없었다.

    콘돔을 쓰지 않는 군인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일주일에 한 번씩 성병과 임신 검사를 당해야 했다. 임신한 여자들은 그날 밤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고, 성병에 걸린 여자들은 주사를 맞아야 했다. 어느새 소녀의 얇고 흰 팔뚝은 성병주사 ‘606’의 주삿바늘 자국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고통스럽고 무서웠지만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면 맞았고, 도망을 치면 죽는다고 했다. 죽지 못하니 살아야 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나라, 아무도 모르는 곳 작은 방에 갇힌 채 지친 몸으로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몰래 우는 것 외엔 없었다. 그렇게 필리핀과 대만을 오가며 끔찍했던 7년을 버텼다.

    “그 나라 달과 별은 참 예뻤어요. 매일 밤 손님이 다 나가고 나면, 폭탄 터지는 소리 들으면서 달 보며 빌었지. 제발 여기서 살아 나가 고향에 가서 우리 엄마 만나게 해달라고. 엄마가, 고향이 너무 그리웠지요.”



    ▲돌아온 고향, 죄인 아닌 죄인이 되다

    ‘살아서 엄마를 보겠다’는 소녀의 염원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일본군 장교 도움으로 위안소를 벗어나 일본군함을 타고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7년 만에 찾은 고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가 일본에 납치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고, 남동생은 일본에 강제 징병됐다고 했다.

    이모와 함께 고향에서의 생활을 시작했지만, 세상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스스로도 죄인이 된 것 같아 목소리 한번 크게 낼 수가 없었다.

    스물여섯, 평범한 여자처럼 결혼하는 것도 꿈꿀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10살 차이 나는 남자의 첩살이를 택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도 순탄치는 못했다.

    아이를 원했지만 그마저도 이뤄지지 않았다. 두 차례 임신을 했지만 모두 4개월 만에 사산됐다. 7년간의 지옥 같은 시간이 남긴 상처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자의 과거는 짐이 돼 평생을 짓눌렀고, 남자의 폭력과 가족들의 괄시도 참고 살아야만 했다.

    13년을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덧 40대 중년이 됐다.  남자와 본처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당시 어렸던 본처의 아들을 키우게 됐다.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몸이었기에,  애착을 가지고 내 식처럼 키웠다. 하지만 그 아들과의 인연도 끝이 좋지 않았다. 보조금 문제로 갈등을 겪다 집에서 내쫓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는 남들에게 말도 제대로 못했어요. 내가 그런 곳에 갔다온 여자니까, 다 참았지. 시집도 가고 싶고 아기도 낳고 싶었는데, 다 안 됐어. 그래서 아직 내 몸이 가스나 몸이야.”


    ▲18세 소녀, 복득이를 위해

    올해로 95세, 현존하는 위안부 중 최고령이 된 할머니는 지금 통영시 장항동의 한 사글셋방에 홀로 살고 있다.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15만 원짜리다.

    한쪽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다 허리 부상으로 다리도 절고, 얼마 전에는 부상으로 팔목뼈까지 부러졌지만, 할머니의 집은 마치 깔끔 떠는 숙녀방처럼 깨끗하게 정리정돈돼 있다. 밝고 부지런한 성품 탓이다. 취재진이 찾았을 때도 성치 않은 몸으로 자꾸 차를 내주려는 할머니를 겨우 만류했다. 할머니는 생활비로 나오는 정부 보조금을 모아 통영여고 학생들에게 2000만 원을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도 했다

    할머니와 딸처럼 지내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하는 통영거제시민모임>의 송도자 대표는 “할머니는 늘 소녀처럼 밝고 예쁘게 사신다”며 “요즘 몸이 안 좋아지면서 거동이 불편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쾌활하고 적극적이시다”고 말했다.

    그 성격 덕에 할머니는 세상에 위안부 실상을 알리고, 일본에 피해 보상을 촉구하는 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고령의 몸으로 서울에서 열리는 수요시위에 직접 참가하고, 힘겨운 기억들을 대중 앞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지난 2010년에는 송 대표와 함께 일본을 찾아 탄원서를 전달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의 실태를 알렸다. 이 모든 활동은 죄인 아닌 죄인이 돼버렸던 ‘18세 소녀 복득이’를 위해, 또 복득이와 같은 아픔을 지닌 수많은 피해 여성들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함께 의지하고 지내던 통영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하나둘씩 세상과 먼저 이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할머니의 기력도 나날이 쇠해지고 있다. 이제 통영에는 4명의 위안부 할머니 중 할머니만 남았다.

    게다가 몇 달 전, 유일한 혈육인 남동생이 눈을 먼저 감은 후 할머니는 밤마다 눈물로 지샌다고 했다. 외롭고, 분통하고 아픈 마음을 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는 이제 귀찮아, 더럽구로, 머하러 더 살겠노. 이제 시집도 못 갈끼고.(웃음), 빨리 죽고 다시 태어나서 평범하게 신랑 만나서 아이도 낳고 아옹다옹 살아보고 싶어. 다만 죽기 전에 일본놈들 사죄 좀 받아 보고 싶은 게 전부라.”

    글=조고운 기자 lucky@knnews.co.kr

    사진=성민건 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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