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 (25·끝) 민족 지도자 백산 안희제 선생만주서 민족교육·독립사상 고취
안희제 선생
안희제(安熙濟, 1885~1943년) 선생의 호는 백산(白山)으로 의령 출신이다.일찍이 보성법률학교(고려대학교 전신)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봄에 양정의숙(養正義塾) 경제과로 전학해 24세에 졸업했다. 1907년 동래군 구포면(현 부산시 북구 구포동)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했다.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했다. 1909년 10월에는 서상일(徐相日)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 청년결사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설해 활...2017-07-27 07:00:00
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 (24) 의열단 창립 주도한 황상규 의사무기 구입 등 일제 요인 암살 지원
황상규 의사
황상규(黃尙奎, 1890~1931년) 의사의 호는 백민(白民)으로 밀양 출신이다. 일찍이 교육 사업에 뜻을 두고 밀양 고명학원(高明學院) 교사로 재직하면서 이란 역사교재를 저술했다. 또한 밀양의 선각자 전홍표(全鴻杓)가 경영하던 동화학원(東化學院)을 인수해 청년학도 200여명을 배출시켰다.그러나 일경의 탄압으로 1918년 만주 지린성(吉林省)으로 망명했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 광복지사와 함께 ‘기미독립선언서’에 앞서 독자적으로 를 발표하고, 1919년...정오복 기자 2017-07-20 07:00:00
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 (23) 국내 반일투쟁의 선봉 여병섭 선생신간회 마산지부 설립 주도
동아일보(1921.3.3.) 기사. 마산지국장 여병섭, 기자 이윤재 선생의 이름이 보인다.
여병섭(呂柄燮, 1890년 8월 21일~1934년 7월 27일) 선생은 고성 출신이다. 평양신학교 재학 중 1917년 평양에서 조직된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에 참가해 경상도 구역장으로 활동했다. 조선국민회는 1914년 1차 대전의 발발과 함께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것을 예견하면서 장일환(張日煥)이 미주국민회의 박용만(朴容萬)과 연결돼 1915년부터 조직 결성을 준비해 오다가 평양의 숭실학교와 평양신학교 출신자 및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1917년 3...2017-07-13 07:00:00
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 (22) 한글 지키기 선봉 남저 이우식 선생‘시대일보’ 등 신문 창간 민족의식 고취
이우식 선생
이우식(李祐植, 1891년 7월 22일~1966년 7월 5일) 선생의 호는 남저(南樗)이고, 의령 출신이다. 선생은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했다.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기해 구여순(具汝淳)·최정학(崔正學) 등 동지들과 의령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이튿날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인 다음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1920년 귀국해 부산에서 안희제(安熙濟)·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해 ...정오복 기자 2017-07-06 07:00:00
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 (21) 대한독립군 참모장 허승환 장군러시아서 혁명군 조직해 항일 투쟁
허승환 장군
허승환(許承煥, 1893~1938년) 장군은 통영 출신으로 본명은 허승완(許承完)이다.청소년기에 경술국치를 당한 청년 허승완은 조국 광복을 도모하고자 1918년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고, 1920년 12월 일본군의 간도 출병으로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로 이동 중 밀산(密山)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이때 의군부(義軍府) 소속이었던 그는 대한독립군단 중대장을 맡았다. 이듬해 7월 러시아 수이푼(秋風)에서 최태순, 장승옥, 임명선 등과 함께 한족공산당에 합류해 제1기 대대장, 제2기 독립대장을 역임...2017-06-29 07:00:00
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 (20) 부친 의진에 참여했다가 순국한 서두성일본군 양산수비대와 교전 중 숨져
서두성의 순국 내용이 기록된 ‘폭도에 관한 편책’.
서두성(徐斗成, 미상~1908년)은 의병장 서병희(徐炳熙)의 아들로 양산군(현 양산시) 중북면 좌삼리 출신이다.서병희 의병장은 1907년 겨울 임진·한탄강 유역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던 허위(許蔿) 의병장으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서 거사하라는 권유를 받고 해산 군인 5명을 거느리고 내려왔다. 그는 경주·언양·양산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던 윤정의(尹政義) 의진과 연합해 울산수비대를 습격하고, 경주군 산내면에서 경주수비대와 교전을 벌였다. 이듬해 5월에는 양산 일대에서...2017-06-22 07:00:00
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 (19) 의병투쟁과 진주 3·1혁명 주도 박진환 선생진주서 만세시위 이끌어 3년 옥고
박진환 지사 등 16명의 판결문.
애국지사 박진환(朴進煥, 1888~1950년) 선생의 본적은 진주시 평안동 115이고, 주소는 평안동 432번지이다.1907년 의병장 유종환(兪宗煥)이 이끄는 의병진영에 참여해 거창·안의(현 함양군 속면), 전북 무주, 충북 영동·황간(현 영동 속면) 등지로 다니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모아 의병투쟁을 벌였고, 이듬해 4월 27일 전북 무주군 무풍면 마곡에서 당시 악명이 높았던 ‘야마다(山田) 토벌대’와 3시간 동안 격전을 치르면서 무려 37명의 의병이 전사하고, 유종환 의병장은 큰 부상을 당했다. ...2017-06-15 07:00:00
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 (18) 허당 명도석 선생마산 3·1운동 주도…창씨개명 거부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에 있는 명도석 선생 기념비.
마산 3·1혁명 주도하다허당(虛堂) 명도석(明道奭, 1885~1954년) 선생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성동 출신의 애국지사이다.1919년 3월 10일, 함안군 칠원(漆原)의 기독교도와 구마산의 교도들이 비밀 연락을 갖고 장날에 봉기하려다가 사전에 칠원주재소 경찰에게 탐지돼 일시 중지했는데, 이튿날 부산진 일신여학교 여학생들이 독립 만세시위의 횃불을 올렸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창신·의신학교 학생들의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했다.3월 12일, 드디어 창신학교와 의신학교 전 ...정오복 기자 2017-06-08 07:00:00
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 (17) 태항산전투 겨레의 별이 된 윤세주 장군중국서 의열단 조직 반일무장투쟁
중국 태항산에 있는 윤세주 장군 묘.
윤세주(尹世胄, 1901~1942) 장군은 김원봉(金元鳳)과 더불어 밀양이 낳은 반일무장투쟁의 상징이다.그의 본명은 소룡(小龍)이고, 호는 석정(石正)으로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밀양에서 대규모 시위를 주동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 밀양지국을 비밀리에 운영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가석방된 후 만주로 망명했다.그는 유하현 고산자(孤山子)에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9년 11월 9일에 길림성 파호...2017-06-01 07:00:00
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 (16) 통의부·정의부에서 맹활약한 이종건 장군수십년간 만주지역 반일무장투쟁 이끌어
대한통의부 본부 유허지인 중국 요령성.
광복 직후이던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에서 김산(金山)·김원봉(金元鳳)·김희남(金熙南)·유동열(柳東說)·이규채(李圭彩)·이종건(李鍾乾)·최윤동(崔允東) 등이 국방위원으로 선임되어 새로 수립될 정부와 군대를 양성할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어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입헌기념식이 열렸다.이 자리에서 맹활약하던 이가 이종건인데, 그는 1887년 통영시에서 태어나서 경술국치 후 서간도에 들어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만주지역에서 반...2017-05-25 07:00:00
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 (15) 2·8 독립선언 활동 김철수 지사도쿄 유학 중 체포 9개월간 옥고
2·8 독립선언서
‘전조선(全朝鮮) 청년독립단은 아 2천만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만국의 전(前)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중략)이에 우리 민족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 민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줄 것을 요구하며, 만일 그러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해 우리 민족의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조선청년독립단 대표자 최팔용(崔八鏞) 이종근(李琮根) 김도연(金度演) 송계백(宋繼白) 이광수(李光洙) 최근우(崔謹愚) 김철수(金喆壽) 김상...2017-05-18 07:00:00
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 (14) ‘노응규 황간의진’의 종사관 노공일 지사의병 규합해 무기 제조·운반 활약
노공일 지사가 종사관으로 있던 황간의진이 활약했던 충북 영동군 물한계곡.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상실될 위기에 처하자 거창·초계(현 합천군 초계면)·합천군 등지의 우국지사들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 장소는 충북 황간(현 충북 영동군 속면)이었다. 의병을 일으킨 대장은 전기 의병 때 진주성을 점령했던 노응규(盧應奎) 의병장으로 당시 동궁시종관(정3품, 황태자 비서실장)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의병을 모아 서울로 진격, 일제 군경을 쳐부술 계획이었다.이에 앞서 을사늑약 직후 노응규가 벼슬을 내놓자 광무...2017-05-11 07:00:00
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 (13) 신사참배 거부로 옥사한 주기철 목사일본숭배 반대운동 펼치다 순국
주기철 목사.
1926년 3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나이 서른의 사내는 중얼거렸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뒤따라 갈 수가 있을까?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함께 세 아들을 이끌고 목회자의 길을 가야 한다.”
고뇌하며 1500리(589㎞) 떨어진 부산 초량교회로 향했던 이가 있었으니, 그가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이다.
그는 창원군 웅천면(현 창원시 진해구) 북부리 농가에서 주현성(朱炫聲)과 조재선(曺在善) 사이에 4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기복(基福), 호는 소양(蘇羊)...2017-05-04 07:00:00
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 (12) 3·1혁명 순국지사 안지호 선생3000명 참여한 3·19 함안장 만세시위 주도
안지호 선생 판결문.
3·1혁명 후 옥중에서 순국한 안지호(安知鎬, 1857~1921) 선생은 고성 출신으로 경남 출신 3·1혁명 공로자 중 가장 높은 등급의 서훈이 추서된 분이기도 하다.
안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통감부와 일본 정부에 논책문(論責文)을 보냈다가 몇 차례 구금됐으며,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기자 만국공관에 호소문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조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다가 부산지방법원 마산...정오복 기자 2017-04-27 07:00:00
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 (11) 한말 하동의병장 박홍지의 투혼군수품 모아 일본 군경과 사투
하동군 악양면에 있는 하동의병공원./하동군/
박홍지(朴弘之) 의병장은 하동군 화개하면(花開下面) 정서리(亭西里, 현 악양면 속리) 출신이다. 1908년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당시 28세 나이에 분연히 궐기해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 1848~1907년) 의병진영에 참여해 국권 회복에 나섰다.녹천은 전남 창평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금산 ‘7백의총’에 잠든 의병과 함께 순국한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의병장의 둘째 아들인 인후(因厚)의 사손(使孫, 조선 시대에 자녀가 없이 죽은 사람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일정한 ...2017-04-20 07: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