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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7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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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의 꿈으로 남은 독립지사… 난 한 일이 없습니다”

[3.1절 기획] 애국지사 정규섭 선생 인터뷰

  • 기사입력 : 2014-02-2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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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지사 정규섭 옹이 일본 헌병대에 잡혀 고문 받은 일 등 항일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3월 1일은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세계에 떨친 제95주년 3·1절이다.

    1919년 기미년 3월 1일, 나라를 빼앗기고 억압받던 한민족은 전국 곳곳에서 일제의 총칼에 분연히 맞서 떨치고 일어났다. 드높은 자존과 숭고한 독립정신을 전 세계에 알렸다.

    애국지사 정규섭(87·진주) 옹을 만나 항일활동에 대해 듣고 그날의 함성이 있었던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연개장터를 찾아 선조들의 숨결을 느꼈다.



    여든일곱의 애국지사는 취재진에게 잠깐 기다리라며 재킷을 걸치고 나와 점잖게 정좌했다. 절도 있는 자세에는 결기마저 어려 있었다.

    정규섭 지사는 경남에 생존해 있는 3명의 애국지사 중 한 명이다.

    17살이던 1943년, 진주공립중학교 4학년 재학 중에 강필진, 김상훈 등 7명의 뜻있는 친구들과 광명회(光明會)라는 서클을 조직해 역사를 공부하고 한글 사용을 생활화하며 매월 강요당하던 신사참배를 거부할 것을 결의했다.

    시대가 시대 나름이겠지만, 연예인에 열광하고 스마트폰을 신봉하는 요즘 17살들과는 비교가 불가한 ‘과거지사’다.

    “광명회를 조직했던 친구 박노건의 부친은 상해임시정부 요인이었고 하익봉의 형은 독립운동가였지요. 그분들이 들려주시는 세계 정세는 젊은 피를 들끓게 했습니다. 졸업 후에 꼭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지사가 되자고 도원결의를 했지요.”

    이듬해인 1944년, 대동아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의 폭압은 더욱 극악해졌다. “매일 강제노역에 동원되었지요. 비행장을 닦고 군수품을 나르는 게 학생들 할 일이었습니다. 그해 가을에 진주지역 300명의 학생들이 차출돼 경화동 진해비행장(鎭海飛行場) 건설공사에 투입되었습니다. 흙을 실어 나르고 치우는 중노동을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졌습니다. 9월 23일인가 그랬을 겁니다. 진주에서 부모님이 면회를 오셨다고 불려나갔더니 헌병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아직도 그는 자신이 왜 헌병대에 잡혀 갔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광명회 활동이 발각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헌병들의 질문은 오직 한 가지였다.

    “독립만세를 불렀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이 질문의 대답은 무엇이든 상관이 없었다. “진해헌병대 영내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손가락 사이에 막대를 끼워 관절을 으스러뜨리고, 한 번에 50~60대씩 몽둥이 찜질을 합디다.”

    그는 혼미한 상태에서 “아니오”라고도 했다가 “네”라고도 했다. 같은 해 11월 2일 부산형무소로 이감됐다.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

    자지도, 잘 먹지도 못하는 하염없는 기다림의 9개월이 지나갔다. 그러던 중 이듬해인 1945년 8월, 갑작스런 광복을 맞았다.

    “나의 행위에는 죄가 없다, 내 나라는 자유다는 사실에 감격했지요. 상해를 누비는 독립지사가 되려던 결의는 이루어지지 못한 청운의 꿈으로 남았지만 말입니다.”

    이후 정 지사는 30여 년간 교직에 몸담으며 5남 1녀를 두었다. 2010년에는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하지만 뒤늦은 보상들이 그저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7명 중 2명은 끝끝내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기록이 소실되었기 때문이었지요. 애국심과 충정이 서류상의 증명으로 평가되어져야만 했습니다. 그 친구들 떠올리면 아직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픕니다.” 그나마 7명의 동지들 중 다섯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기자 양반, 나는 한 일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그의 말은 그의 인생을 지나갔던 70년 세월을 되돌려 놓은 듯했다. 다음 해, 그다음 해 3·1절에도 늘 정정하시라는 기자의 작별인사에 그는 열일곱 소년처럼 웃었다.

    김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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