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미리벌민속박물관 성재정(73) 관장이 지난 4일부터 29일까지 NH농협은행 경남영업부 객장에서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전시하는 ‘전통 목가구 특별기획전’을 무료로 개최해 창원시민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성 관장은 이번 특별기획전에 일반인이 감상하기 어려운 표암 강세황 선생 친필 8폭 행서 병풍을 비롯, 추사 김정희 선생의 해남옥돌 반야심경 양각 작품, 고관대작들이 사용한 평상, 여인들의 안방평상, 안방가구 등 진귀한 민속유물 60여 점을 공개했다.
성 관장은 이와 함께 객장의 손님들에게 전시된 유물의 특징과 사용방법, 유물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일일이 설명하는 정성을 보였다.
성 관장은 민속유물 수집에 한평생을 바쳐 왔다. 사재를 털어 수집한 민속유물을 일반에 공개하기 위해 밀양 초동면에 ‘미리벌민속박물관’을 만들었다. 성 관장을 만나 민속유물을 수집하게 된 계기와 보람, 고충,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밀양 미리벌민속박물관 성재정 관장이 전시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전강용 기자/
◆“어머니, 책 궤짝 팔면 안됩니다”
성재정 관장에게 민속유물에 애착을 갖게 된 배경을 묻자 다음과 같은 일화를 설명하며 답을 대신했다.
당시 국민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어머니가 성 관장을 불러놓고 “골동품 수집상이 증조할아버지 책 궤짝을 팔라 하는데, 어떡하면 좋겠느냐”며 의견을 물었다.
아버지가 7살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머니는 집안의 대소사를 어린 성 관장과 모두 상의해서 결정했다.
가세가 어려워 고민하던 어머니는 내심 책 궤짝을 팔아 돈을 조금 만들어 가계에 보태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때 성 관장은 어머니께 “증조할아버지의 유품이자 중요한 고문서가 수두룩한 궤짝을 돈으로 바꾸면 안됩니다”라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어머니는 10살 꼬마의 판단과 결정을 존중해 그 궤짝을 팔지 않았다.
성 관장이 살던 진양군 대곡면 와룡리 봉평마을은 창녕성씨 집성촌인데, 조상들이 대대로 사용해온 책 궤짝을 돈과 바꾸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다.
성 관장은 “만약 책 궤짝을 팔면 골동품 수집상이 궤짝을 들고 마을 골목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그 모습을 친지들이 보면 우리집을 어떻게 생각했겠느냐”며 궤짝 지킨 일은 정말 잘한 결정이라고 밝힌다.
한평생 민속유물 구입과 보전에 매진한 성 관장의 집념은 꼬마 시절 증조부의 책 궤짝 지킨 일에서부터 표출된 일생의 사명처럼 느껴진다.
◆민속유물 수집에 전국 누벼
30세가 된 성 관장은 삼성출판사 영업부에 입사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다. 이미 민속유물에 심취해 있던 성 관장은 월급을 받으면 그 즉시 민속품 구입에 나섰다. 업무차 전국을 다니기도 했지만 민속품 수집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당시 5급 공무원 월급이 2만4000원인 데 반해 성 관장은 15만~20만원을 받았다. 그 월급으로 고향의 논 한 마지기가 6만원 할 때 반닫이 15만~30만원짜리를 구입하기도 했다. 신용이 좋아 돈이 모라자면 외상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런데 회사 창립기념일이던 어느 해 3월. 당시 김종규 삼성출판사 사장이 전 직원들 앞에서 “앞으로 ‘삼성출판박물관’을 만들겠다”고 밝히자 성 관장은 번개 맞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은 민속유물을 모으기만 했지 이것으로 무얼 할 것이라는 구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 사장의 말을 듣는 순간 “아, 그럼 나는 민속박물관을 건립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 관장의 큰집이 만석꾼이라 그 집안 농기구만 모아도 웬만한 박물관을 만들고도 남을 정도였으니, 민속박물관 만들기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후 성 관장은 유럽, 일본, 중국을 다니면서 유물 보관법, 박물관 시설·운영방법 등을 배우며 민속박물관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삼성출판사 창원지사장이던 1987년 회사를 그만둘 때 자신의 아파트 대부분 공간에 유물을 쌓아둘 정도로 모았고, 아파트 지하공간을 임대해 쌓아두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유물을 모은 성 관장은 “땅을 샀으면 지금처럼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지켰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절로 웃음이 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