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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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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명이 시인이 찾은 진양호

  • 기사입력 : 2006-05-19 1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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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늦봄 강가 버들로 푸르고…


      봄은 물비늘엔 햇살을. 버들엔 푸른 가지를 입혔다. 대평면 일대는 남강댐의 상류. 커다란 호수가 거느린 동네다. 물가에서 만나는 늦봄은 온통 버들로 푸르다. 물버들에다 수양버들. 버들강아지까지. 넘치도록 잘 차려진 봄을 폭식하는 한낮이다. 물버들이 몸을 젖힐 때마다 더없이 푸른 기운이 차오른다. 수장당한 몸이나 다름없는 저 몸 어디에 저런 기운이 있을까? 유연하나 강인한 저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물은 아무리 멀리 떠나 있었어도 돌아와 물 앞에 서면 우리를 다시 먼 길로 떠나게 한다. 물은 모든 시작의 시작이다. 그 시작을 따라가 보면 신화 속의 성북 청하(城北 靑河)가 나온다. 처녀 유화(柳花)의 강변이 나온다. 버들잎 처녀. 유화. 버들강아지꽃. 나지막한 키에 여러 포기가 뭉쳐져 이른 봄에 고개 내민 앙증맞은 꽃이 버들강아지다. 물의 신 하백은 귀여운 맏딸에게 유화라는 이름을 주었다. 물에서 세계가 태어났듯 물과 버드나무의 여신 유화도 갯버들이 잘 자라는 강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예쁜 이마를 버들이마(柳眉). 우아하고 늘씬한 맵시를 버들맵시(柳態). 가느다란 개미허리를 버들허리(柳腰)라 한다. 버들의 이름으로 성장한 버들잎 처녀 유화의 아름다움이 눈부셨던 것도 이런 봄날이었다. 그 아름다움을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가 사랑한 것도 봄날의 강가였다. 봄처럼 짧았지만 봄처럼 뿌리 깊었던 사랑이었다. 바람난 딸에게 실망한 하백은 딸을 추방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 하나를 낳았다. 그렇게 버들 처녀 유화는 동북아시아의 어머니가 되었다지….

      왜가리 날아오르는 소리와 바람이 먹이는 간지럼이 몽유 속의 나를 현실로 데리고 온다. 현실의 오월이란 온갖 행사가 모인 달이기도 하다. 엊그제 지나간 어버이날. 스승의 날. 어린이날과 겹친 부처님 오신 날까지. 무심코 지나온 일들인데 지금 눈앞에 지천인 버들은 또 다른 감로(甘露)의 세계로 나를 이끈다. 관세음은 중생이 괴로울 때 그 이름을 외며 구원을 구하면 곧 사랑과 자비로써 사람의 고뇌를 없애고 구원해 준다는 보살이다. 14세기 초의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를 보면 관세음이 다름 아닌 버들가지를 들고 있다. 병에도 버드나무가 꽂혀 있다. 버들은 실바람에 나부끼듯 미천한 중생의 작은 소원도 귀 기울여 듣는 자비의 상징인 것이다.

      버들가지가 꽂혀있는 관세음의 물병 속에는 감로수가 들어 있다. 이를 중생에게 뿌려 번뇌와 욕망으로 고통받는 중생을 정화한다고 한다. 실제로 버들의 뿌리는 감로수를 깨끗이 하는 능력이 있다. 오래 둬 잔뿌리가 나오기 시작하면 물에 녹아있는 질소와 인산을 흡수해 물을 맑게 하는 정화의 기능을 한다. 물은 이렇게 스스로를 걸러내면서 조용히 제 몫의 생명을 길러낸다. 물버들을 품에 안은 이 물가에서 내 안의 오류와 불순을 걸러내 본다. 버들이 물을 정화해주는 여기는 정녕 감로의 세계인가 보다. 물은 고인 듯하나 흐르고 설명할 길 없는 봄날도 흘러간다.

      옛 사람이 연인과 헤어질 때 배웅을 하는 마지막 이별 장소는 흔히 나루터였다. 이별의 장소 물가에는 버들이 있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버들은 역사 속에서 여인의 사랑과 증오에 연루된 경우가 많았다.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눈물을 감추고 버들을 건네주는 임의 뜻은 그랬다.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산들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내 마음을 나도 모른다는 투정이었다. 그런 이유들만으로도 버들을 오해했었다. 너무나 자주 보고 흔해 빠진 것도 이유였다. 가지의 연약함에서 가냘픈 여인으로 형상화되는 것도 달갑지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버들을 건네주는 임의 투정을 받아들이고 싶다.

      어디에든 그냥 꽂아만 두어도 뿌리를 내리는 버들의 자람은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 준다. 버들의 성장은 무척 빨라 한 해 동안 자라는 가지가 매우 길고 가늘다. 또 많은 잎이 달린다. 자연히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래로 늘어질 수밖에 없다. 하늘을 향해 일어설 엄두도 못 낼 만큼 생명의 기운으로 꽉 차있다. 이런 기운으로 버들은 그가 꽂힌 자리가 그 어디든 힘차게 자라고. 제가 생장하는 장소를 생명의 기운으로 맑게 정화한다.

      그러고 보니. 버들을 건넨 임은 늘어져 간들거리는 투정을 한 것이 아니었다. 버들의 푸름을 간직해서 거듭나고 거듭날 임을 향한 마음을 심은 거다. ‘산 버들가지 골라 꺾어 임에게 드리오니/ 주무시는 창가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 내릴 때 새 잎이라도 나거든 날 본 듯 여기소서’ 조선 중기에 기생 홍랑이 지어 헤어지게 된 애인에게 바친 시 한수의 곁가지를 꺾어든다. 어디에서건 지속될 또 다른 삶을 원하는 버들의 생명력을 내 안에 심는다. 눈앞의 물버들이 산들바람에 실려 일제히 몸을 비튼다. 아직 보여주지 못한 봄빛을 서둘러 챙겨줄 듯이.

      ▲손명이 시인과 함께 신록으로 출렁이는 진양호 주변을 한바퀴 돌았다. 엊그제 내린 비로 탁해진 호수에 물버들은 자신의 가슴까지 내어주고 또 다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완사를 거쳐 물길이 좁아진 대평면에서 닻을 내렸다. 조 시인은 조그마한 다리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무언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경상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개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진주문인협회 회원. 손선생논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종훈기자 leej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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