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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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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비행기 ‘부활호’ 설계자 이원복 예비역 대령

“한국 우주항공산업 재도약하길”
지난 53년 비행정비 하사관 양성소 교관 시절 제작

  • 기사입력 : 2008-10-28 15:3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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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년 당시 서울대 항공공학과를 졸업 후 공군사관학교 항공기술원 양성소 문관으로 근무하다 6·25 전쟁 발발로 소위로 공군에 정식 입대해 오면서 순수 우리 기술로 비행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시라도 잊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난 23일 사천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된 자신의 흉상 제막식에 참석한 국내 최초의 비행기 부활호 설계·제작자인 예비역 공군 대령 이원복(82·서울)씨.

    이씨는 비행기 만들 당시를 회상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입을 열었다. 지난 53년 비행정비 하사관 양성소 교관으로 근무할 무렵 일본이 패망한 이후 미국으로부터 비행기 제작이 중단됐다. 이 기회를 틈타 우리나라도 비행기를 가져야겠다는 욕심으로 제작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기였다고 한다.

    비행기를 완성한 후 김해로 옮긴 후 이듬해인 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키라는 뜻이 담긴 부활호라는 친필 휘호를 내림으로써 정식 이름이 붙여졌다.

    지난 1일 국군의 날에 근대문화재 411호로 등록된 국산 1호기 부활호는 당시 일본과 미국 비행기와는 달리 수륙양용형 비행기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비행기 뒤 아래편에 별도의 창문을 부착해 비행기 뒤편에 앉은 부조종사가 대북 전단을 뿌릴 수 있었으며, 폭탄을 투하 할 수 있는 전폭기 역할을 해 낼 수 있었다.

    당시 속도와 안전성에 있어 세계 최고 성능의 비행기였다고 이씨는 강조했다.

    지난 60년까지 공군 정찰임무와 훈련기로 활약하다가 종적을 감췄다가 지난 2004년 대구 경상공고 지하에서 뼈대만 남은 부활호를 찾아 공군 군수사령부 제81항공정비창에서 복원돼 공군 수리창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부활호를 보면서 비행기를 만들 그 당시 일일이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많은 어려웠던 점을 생각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 전후 복구작업이 이뤄지고 있던 50년대, 정부의 무관심 속에 비행기를 제작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였다. 특히 당시 기술력으로 볼 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길이 6.6m, 폭 12.7m, 중량 380㎏, 최대 시속 180㎞에 이르는 비행기를 자체 설계를 통해 제작한 후 사천 하늘을 날아 오를 때 그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이원복 전 대령은 세계도, 미국도 놀랐었다고 말을 이었다.

    이씨는 “50여년 만에 새롭게 부활한 부활호를 볼 때 이젠 우리나라도 우주로 나아가는 나라로, 또 세계에 위상을 펼치는 나라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며 “공군 복원팀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 비행기를 복원해 우리나라 상공을 비행할 수 있도록 해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부활호의 재탄생을 계기로 한국 우주항공산업이 재도약해야 한다”며 “흉상 제막과 부활호 재탄생에 도움 준 분들 모두에게 거듭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최인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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