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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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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8) 이승기 마산문화원 영상자료관장

“나이 칠십이지만, 영화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뜁니다”

  • 기사입력 : 2009-07-2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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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문화원 영상자료관 이승기 관장이 자료실에서 옛 비디오 테이프를 보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마산종합운동장 한편에 마련된 마산문화원 영상자료관. 2007년 10월 개관한 이곳에는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영화 포스터, 잡지, 이론서, 비디오, DVD 등 영화관련 자료 수천 점이 전시 보관되고 있다.

    이 방대한 자료를 수집한 이가 현재 영상자료관장을 맡고 있는 이승기(70)씨다. 어릴 적 영화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늙도록 간직한 영화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평생을 영화와 함께 살아온 이승기 관장을 만나 봤다.

    ▲6살, 영화와 첫 인연

    그의 고향은 통영군 통영읍 명정동이다. 일제시대 부산제2상업학교를 중퇴한 선친이 서기로 일한 금융조합 뒤편에 봉래극장이 있었다. 지금은 철거돼 흔적도 없지만 1950년대 통영에서는 유일한 극장이었다.

    6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봉래극장에서 태평양전쟁 뉴스, 사무라이 영화를 봤다. 영화와 맺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충렬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낙동강’, ‘마음의 고향’, ‘아리랑’ 등을 단체 관람하면서 차츰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졸업 후 친구들은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진학하지 못하고 동네 형들과 어울려 일명 ‘개구멍 뚫기’로 영화를 보러 다녔다. 오래된 일본식 건물인 봉래극장에는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개구멍이 있었다. 극장에서는 나무판자로 개구멍을 막아 놓았지만 아이들은 저녁에 나무판자를 떼어내고 극장으로 잠입해 영화를 봤다.

    한번은 미국 영화 ‘화성정복기’를 상영했는데 표를 사서 입장한 관객보다 ‘개구멍 뚫기’로 들어온 아이들이 많아 극장 직원들이 아이들 체포(?)에 나섰다. 덩치 큰 형들은 모두 도망가고 혼자 붙잡혀 극장 간판실에 끌려갔다.

    당시에는 몰래 영화를 보다가 잡히면 모욕감을 주기 위해 간판 그리는 물감을 아이 얼굴에 칠했다. 마침 단체관람 온 학생들이 무더기로 입장하면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망쳤다.

    이때 혼이 난 뒤부터는 ‘개구멍 뚫기’를 그만뒀다. 극장 청소하는 친구를 따라가 일을 도와주거나 통영시내 요지에 걸어 놓았던 영화 간판을 극장에 가져다주고 공짜로 영화를 봤다.

    마산 구산면에 사는 고모가 조카 공부시켜 준다고 해 1953년 마산으로 오게 됐다. 마산서중에 응시했으나 불합격해 후기인 창신중에 다니게 됐다. 그러나 학교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4교시가 끝나면 도시락을 까먹고 오후 2시부터 상영하는 국제극장으로 가곤 했다.

    ▲영화 관련 자료 수집 시작

    중학교 3학년 때 미국 영화 ‘푸른 화원’(원제 ‘작은 아씨들’)을 감명 깊게 보고 영어선생님께 번역을 부탁해 둘째 딸로 출연한 인기 여배우 준 알리슨에게 팬레터를 보냈다. ‘당신 영화를 보고 감동 받았다. 사인한 브로마이드를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지만 결국 답장을 받지 못했다.

    영화 관련 자료 수집은 이때부터 시작했다. 마산에 있는 극장에서는 창동거리에 있는 일제시대 집 유리창에 영화 포스터를 붙여 놓았다가 영화가 종영되면 회수해 갔다. 유리가 깨져 있는 집을 눈여겨봐 뒀다가 야간 통행금지가 끝나거나 해제될 무렵 몰래 포스터를 떼 왔다.

    그렇게 30장가량 모았는데 안타깝게도 어머니의 구멍가게에서 한 홉씩 팔던 밀가루를 담는 봉투로 사용해 버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영화 포스터를 축소해 뒷면에 해설을 붙인 영화 프로그램도 수집했다. 극장에서 한 장에 10환을 받고 팔았는데 한장 한장 사 모아 300장가량 소장하고 있다. 영화 프로그램 같은 광고물은 1960년대 이후 사라져 버려 지금은 희귀한 자료가 됐다.

    학칙이 엄한 마산상고에 진학한 뒤에도 영화 보기는 계속됐다. 그동안 영화를 보면서 축적(?)한 연기력을 발휘해 조퇴하기도 하면서 열심히 극장에 다녔다.

    고교 3학년 때인 1959년 태풍 사라 호가 한국을 강타해 엄청난 피해를 준 다음 날 시민극장에 미국 영화 ‘뇌격명령’을 보러 갔다가 규율부 선생님에게 꼼짝없이 걸렸다. 선생님께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영화를 연이어 두 번이나 봤다.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연출을 공부하려 했지만 어머니의 장사가 망해 영화감독이 되려는 꿈이 좌절되고 주산·부기 공부를 때려치워 취직도 안돼 자포자기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선생님은 15일간 유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행복했던 소극장 시절

    졸업 후 몇 년간 놀고 군에 갔다와 마산 오동동에 있는 술집 경리 담당 지배인으로 일했다. 이후 독립해 맥주홀을 개업했지만 2년 만에 완전히 거덜났다. 그 후부터는 아내가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며 아이들을 공부시켰다.

    1968년부터 18년간 한국연예협회 경상남도지부 사무국장을 했다. 당시 마산에서는 유흥업소가 호황을 누려 연예인들이 많을 때는 200명가량 활동하는데 회비와 자격시험 응시료 수입으로 연예협회 살림살이가 윤택한 편이어서 약간의 수당을 받고 일할 수 있었다.

    사무국장 자리를 내놓은 무렵 전국에 200석 규모의 소극장들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중 마산 합성동 아카데미, 양덕동 한일극장, 석전동 은하극장, 부산 범일동 보림극장, 삼일극장, 삼성극장 등은 2본 동시상영을 했다.

    영화광에겐 더없이 행복한 시절이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극장에 가 영화 두 편을 본 뒤 국수를 사먹고 두 편을 봤다. 보고 싶은 영화가 부산에서 상영된다는 소식을 접하면 일찍 버스를 타고 가 영화 네 편을 본 뒤 시장에서 소주 한 병에 돼지국밥 한 그릇을 먹고 취해 밤늦게 집에 왔다. 2본 동시상영 영화는 보통 6개월 전에 개봉된 작품이 많았는데 어쩌다 보면 한 편을 10번 넘게 보기도 했다.

    이렇게 본 영화의 상영일, 극장, 제작자, 주연, 감상 소감을 기록한 영화일기를 쓰기도 했다. 영화일기를 정리해 보니 한 해 무려 210편을 관람한 적도 있었다.

    ▲결실 맺은 영화 사랑

    영화자료 수집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책을 샀고 비디오 가게를 전전하며 비디오와 DVD를 구했다. 미국에도 세 차례나 방문해 원서, 원음비디오, 영화 포스터 복사본 등을 사왔다.

    이런 노력들이 마산문화원 영상자료관 개관이라는 결실로 맺어졌다. 현재 영상자료관에는 영화 포스터 수천 장, 영화 관련 이론서·잡지 수천 권, 비디오 3000편, DVD 1000편 등이 전시 보관돼 있다.

    자료 수집뿐만 아니라 대학 강의, 책 발간, 배우 출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화 관련 일을 해오고 있다.

    거제대학에서 2년 남짓 ‘영상예술의 세계’ 강좌를 맡았고, 2007년 창원전문대에서 ‘영화와 영화 읽기’를 강의하면서 살아 있는 영화 얘기를 들려줬다.

    영화 관련 서적도 3권 발간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경남신문에 연재한 ‘스크린 야화’를 묶어 1995년 단행본으로 냈고, 2004년에는 수집한 영화 프로그램을 토대로 ‘1950년대 추억의 영화’를 출간했으며 올해 2월엔 ‘마산영화 100년’을 펴냈다.

    ‘마산영화 100년’은 1907년에 문을 연 마산 최초 극장 ‘환서좌’와 마산 최초의 극영화 ‘청춘의 설움’의 소개로 시작해 100년의 시간을 훑어가며 마산의 극장과 영화에 얽힌 이야기, 마산 출신 영화인 등을 담았다. 10여 년 전부터 집필을 마음먹었으나 자료 찾기가 힘들어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3년 전 일제시대부터 영화 자료를 수집해 온 홍영철 한국영화자료연구원 원장이 마산 관련 자료를 찾아주겠다며 집필을 권유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학자나 연구자가 아닌데다 인터넷이 서툴러 자료 찾기가 쉽지 않아 몇 번이나 포기하려 했다. 그럴 때마다 주위의 도움을 받아 탈고할 수 있었다.

    ▲“영화는 세상 보는 나의 창”

    그는 영화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2007년 상영된 박재현 감독의 독립영화 ‘외계인’에서 추억을 회상하는 노인 역을 맡았다. 당시 마산mbc 프로그램 ‘활력천국’에 출연 중이었는데 박 감독의 출연 제안에 흔쾌히 승낙했다. 제작비가 부족해 출연료도 못 받고 밤샘 촬영을 예사로 했지만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너무 기뻐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독립영화 감독들 사이에서 꽤 연기력이 있고 출연료를 안 줘도 된다는 소문이 나 또 출연 제의를 받았다. 오는 9월 상영 예정인 김재한 감독의 독립영화 ‘조용한 가족’(가제)에서 아버지 역을 맡아 열연했다. 연극인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작품으로 지난 6월 진동, 창원 중앙동 소극장 ‘나비’ 등에서 촬영을 마쳤다.

    “시인들이 시의 창을 통해 세상을 보듯이 저는 스크린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제 나이 칠십이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영화란 말을 들으면 가슴이 뜁니다. 난 결국 영화감독이 되진 못했지만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했고 정열을 바쳤기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글=양영석기자 yys@knnews.co.kr

    사진=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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