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역 4번 출구- 이상국
- 기사입력 : 2011-10-20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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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大地)의 소작(小作)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 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 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 어떠세요. 꽤 설득력이 있는 시이지요. 이 시가 설득력을 가지는 건 사사건건(?) 반대 사항에 놓인, 정반대로 살아가야 하는, 아버지와 딸의 구도 속에서 비롯됩니다. 아버지는 ‘대지의 소작(小作)’이고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는 딸은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우는 사람입니다.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우는 사람이라! 우리에게 이 시는 여기에서 또 한 번 설득력을 가집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일하는 걸 배우지 않습니다. 일하는 걸 배우지 않고 부리는 걸 배웁니다. 이것 참 큰일입니다. 우리가 이 시에 나오는 아버지에게 든든함을 느끼는 건 분명하고 확고한 자신감 때문입니다. ‘그거 다 애비가 만든 거니 그리 알라’는 이 확고함…. 결국 나중에 나중에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는 딸도 알게 되겠지요. 나의 아버지가 얼마나 든든하고 건강하게 살다간 분이셨는지.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아빠 잘 가’라고 <나>를 안아주는 딸! 거참, 마지막 <농사>치곤 재밌겠습니다그려. - 유홍준(시인)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