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5월 02일 (목)
전체메뉴

권투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김태형

  • 기사입력 : 2011-11-03 01:00:00
  •   



  • 왜 내가 여기서 흠씬 두들겨 맞아 쓰러져 있는지

    어떤 미친개가 내 안에서 또

    더러운 이빨로 생살을 찢고 기어 나와 몸을 일으키는지

    나는 두 눈으로 똑바로 봐야 한다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얻어맞아 곤죽이 되는 것보다

    그래도 보이는 주먹이 더 견딜 만하다

    누가 나를 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개는 어둠을 향해 짖을 수 있지만

    나는 어디를 향해 짖어야 하는지 모른다

    부러진 손가락에 글러브를 끼고서라도 링 위에 올라야 한다

    그래야 보이지 않는 주먹이 더 이상 나를 향해

    카운트 펀치를 날리지 못할 것이다

    어느 순간 좁은 링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한다

    야유와 빈주먹만 날리던 링 밖의 내 얼굴이 보인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보다도 훨씬 더 마음에 와 닿는 제목!

    무릇 좋은 시란, 이런 것이다. 삶과 죽음이 달린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것이라야 한다. 권투선수는 바로 그 정면 맞대결의 실존인물이다. K1이나 UFC선수들보다 어느 면에선 권투선수들이 더 시적이다.

    권투선수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봐야 한다. 상대를 똑바로 봐야 상대와 맞설 수 있고, 상대를 이길 수 있고, 얻어맞더라도 덜 얻어맞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상대가 도대체 누구라는 거지?

    사실 김태형이란 시인은 운동을 되게 못하게 생겼다. 구기종목도 마찬가지지만 격한 격투기 같은 덴 정말로 안 어울리는 약하고 선한 인상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런 시를 썼다.

    시를 읽다보면 우리는 결국 이 권투선수의 적은, 상대는, 타자가 아니라 자신임을 알게 된다. 그렇다. 권투도 삶도 결국은 나와의 싸움이다. 눈 똑바로 뜨고 바라봐야 하는 대상. 그것은 적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 유홍준(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