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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마산 (주)국심 전계식 대표

“넌 나의 인생” 국화 사랑 30년

  • 기사입력 : 2011-12-13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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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계식 (주)국심 대표가 마산합포구 진북면 금산리 국화농장에서 웃고 있다.
     
    전계식 대표가 국화차를 선보이고 있다.

    철없던 고등학생 때 처음 본 매력에 빠져 인생을 송두리째 던진 사람이 있다. 그 연인이 사람이나 공부 등 통상적인 대상이 아니라 국화라는 꽃이다. “생물도 사람과 똑같다”고 말하는 그는 공무원 생활을 접고 짝사랑하는 국화로 차도 만들고 비누, 샴푸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국내외 소비자에 알리고 파는 데 여념이 없다. “마산만의 해풍을 맞고 자라 육질이 두껍고 향이 짙으며 안개가 없는 천혜의 고장으로 햇볕 쬐임이 많아 약효가 뛰어나다”고 ‘첫사랑’ 국화를 자랑하는 전계식(56) (주)국심 대표를 지난 7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금산리 국화농장에서 만났다.


    만남

    사람도 아닌 꽃, 그것도 국화에 빠져 30년간 외눈박이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

    전 대표는 한국과학기술대학교의 전신인 진주농림전문학교 원예과에 다니면서 화훼연구생으로 처음 국화 향기에 심취했다.

    “오늘날 국화는 보고 즐기는 관상용이지만 당시는 꽃이 큰 대륜이 다수였다”면서 “1970년대는 국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이전 시기”라고 설명했다.

    전 대표는 이어 “당시 정문수 교수 등의 지도를 받았는데 뿌리 내리기와 삽목 등 국화 재배에 관한 기술을 잘 배웠다”고 회고했다.

    학창시절의 국화는 그를 8급 특채로 공직에 입문하도록 이끈다.

    1977년 통영군농촌지도소에서 공직을 출발, 함안·의령·의창군을 거쳐 1990년 국화의 시배지(마산합포구 회원구 삼학사 뒤편 앵지밭골)이자 본고장인 마산시로 온다.




    도전과 성공

    그의 도전과 성공엔 국화가 있다. 가고파 국화축제와 술 ‘가을국화’가 그것이다.

    머릿속에만 있던 국화는 원예특작 업무를 맡으면서 다시 현실이 됐고 그에게 도전하라고 자맥질하듯 쉼 없이 충동질했다.

    “1996년쯤 마산시 농업기술센터 원예특작부서에 근무할 때 마산 국화를 브랜드화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밝힌 그는 이때부터 관상용 국화의 산업화에 대해 고민했다.

    마산이 국내 국화 시배지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머릿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마산시와 시민에게 꼭 필요한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국화를 특화해야 한다’는 생각과 ‘부가가치가 높은 국화 산업’이 그의 목표였다.

    첫 번째 도전은 지난 2000년 마산에서 처음 열린 가고파 국화축제였다.

    전 대표는 “5000만원으로 가고파 국화축제를 시작했다”면서 “진주농림전문학교 시절 학교 축제인 ‘멀구슬(단풍나무의 이름) 축제’ 때 원예과 작품 전시를 도맡은 경험이 내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부족한 예산과 인력은 국화를 군 부대에 기증하는 조건으로 창원 39사단 사병들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다.

    인천까지 5명의 직원들이 직접 견학해 축제를 꾸밀 밑그림을 직접 그렸다. 또 인천국화전시회를 찾아 방치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국화와 조형물을 탑차로 3차례나 옮겨와 축제장을 단장했다.

    “밤잠을 설치며 발바닥이 터질 정도로 뛴 덕에 5000만원을 들인 제1회 국화축제는 대성공이었다”고 말하던 그의 눈가가 어느새 붉어졌다.

    또 다른 도전은 마산특산물 5미(味) 중 하나로 꼽히는 국화 술 ‘가을국화’의 개발이었다.

    전 대표는 축제에 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대형 독에 소주를 붓고 국화꽃을 넣어 술을 만들어 참가자들에게 시음하도록 했다. 그러나 현행 법상 돈을 받고 팔 수 없다는 것이 한계였다.

    술을 빚는 데 자신을 갖게 된 그는 2001년 경남지역을 대표하는 주류업체인 무학소주를 찾았다.

    국화주 생산을 제의하고 승낙을 얻었다.

    전 대표는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할 수 없지만 공무원 대상으로 술 명칭을 공모해 ‘가을국화’로 정하고 초기 예산 확보를 위해 노력하던 일 등 숱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마산시는 무학 측에다 판권을 넘겨주는 대가로 22억5000만원의 세외수입을 올렸다”고 소개했다.



    그칠 줄 모르는 도전

    성공을 달리던 국화축제는 3회까지 하고 4회 땐 태풍 매미가 마산합포구 월영동 등 신마산 일대를 급습, 대형 인명 피해가 발생하면서 전시회로 축소됐다.

    이듬해 5회까지 축제 기획과 운영을 맡아 국화축제를 마산의 대표적인 문화축제로 키운 그는 2005년 공직을 떠난다.

    “‘늦기 전에 국화를 더 산업화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면서도 “가고파 국화축제를 통해 국화를 매체로 한 국화음료 분야의 높은 성장 가능성과 ‘참살이’ 열풍으로 국화가 가지고 있는 고부가가치에 눈을 떴다는 점도 무시하지 못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전 대표는 “마산 국화는 해풍을 맞고 자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재배하는 국화에 비해 품질이 뛰어나다는 것이 내 경험으로 확인됐다”면서 “2007년 3월 국화 재배농가와 25ha에 식용국화 75t을 연간 재배하는 것을 내용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국화를 이용한 신제품 연구 개발에 몰두했다”고 했다.

    2007년 9월에 첫 결실을 맺는다. 국화차 제조방법 특허출원을 냈고 상표를 출원한 것이다.



    끝나지 않은 도전

    국화차만 해도 국담 국화차, 국심 국화차, 중양 국화차, 국담 국화꽃차, 가고파 국화차, 마산 국화차세트, 한방국담 국화차, 한방국심 국화차 등 8종류에 이른다. 맛과 특성, 용도도 제각각이다.

    2007년 2월 마산합포구 3·15대로에 1공장을 연 데 이어 현재 마산합포구 진북면 금산에 2공장 등 1·2공장, 연구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화베개, 국심샴푸, 국심린스, 국심샤워젤, 국심비누, 국심국화차 음료, 국화막걸리 등 24종류의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중국에 수출도 하고 있다. “중국에 국화차를 수출한 것은 아마 마산 국화가 처음일 것”이라면서 전 대표는 환하게 웃었다.

    전 대표는 “마산 국화를 세계에 소개하기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면서 “국화 시배지가 마산임에도 불구하고 상품 및 식품 개발 등의 업무를 기획, 총괄하는 국화연구소가 충남 예산에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행정기관이 안 되면 내 힘으로라도 국화연구소를 설립해 마산 국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산업화하는 데 앞장서고 싶다”고 강조했다.

    “더 하고 싶은 일이 없느냐”는 질문에 전 대표는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국화 밭을 가리키면서 “뒤로는 서북산, 앞으로는 마산만의 해풍을 받고 자라는 이곳 국화야말로 가장 향이 짙고 맛이 깊다”면서 “이 일대를 국화 클러스터로 육성해서 사계절 관광객이 찾아 향을 즐기고 식품으로 음미하는 그런 곳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 대표는 “우리 세대가 끝나고 나면 장례식장에 국화를 놓는 경우도 크게 줄 것”이라면서 “정부가 하루빨리 ‘보는 국화’에서 ‘먹는 국화’로 정책을 전환, 화훼 농민들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공직 떠난 지 오랜데”라면서 곁에 있던 부인이 눈짓으로 그만하라는 듯 말린다. 국화꽃을 닮은 전 대표의 웃음이 저녁 노을처럼 점점 잦아든다.


    글= 이병문기자 bmw@knnews.co.kr

    사진= 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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