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5월 05일 (일)
전체메뉴

나의 작품을 말한다 (32) 소설가 전경린씨

억눌렸던 ‘여성의 언어’ 세상 밖으로 쏟아내다

  • 기사입력 : 2011-12-19 01:00:00
  •   
  • 창원시 귀산동 한 카페 야외 테라스에서 겨울바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소설가 전경린씨.


    “툇마루 아래에 희고 신선한 아침이 가득히 몰려와 있었다. 아침이 왕을 알현하는 사신처럼 그렇게도 낮게 이마를 낮추고 온다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강변마을 부분>

    탁월한 감각과 문체로 독자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소설가 전경린. 모교 경남대 강단에 서기 위해 지난해 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기의 작가’ ‘정념의 작가’ ‘대한민국에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로 통한다.

    지난 14일 잔잔한 파도가 햇살에 반짝이는 전망 좋은 창원 귀산동의 바닷가 한 카페에서 그와 만나 작품세계, 문학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 평범을 거부한 여자

    등단 전 그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소시민이었다. 함안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중학교를 다녔고, 마산여고를 졸업했다. 큰 고민 없이 경남대 독어독문학과로 진학했고, 졸업 후엔 방송작가로 근무했다.

    어릴 때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공책 뒤 페이지부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을 그림으로 그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각적 충돌을 쏟아낼 곳이 필요했기 때문. 그 덕에 아까운 공책을 버린다고 부모님께 혼도 많이 났다.

    그렇다면 밖으로 쏟아낼 수밖에 없었던 자신만의 감수성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어릴 때 아버지 무릎을 베고 마루에 누워 들판에 아련히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어요. 아버지는 네다섯 살 짜리가 아지랑이를 볼 것이라 생각지 못하고 제게 종이라고 둘러대셨습니다. 보통 사람은 잊어버릴 만한 기억이지만 저는 아버지와 딸 사이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공간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절대적인 고독감 속에서 혼자 성장했어요. 남들과 다르게 느끼고 있다는 그 고독감이요…. 그게 문학을 하게 하는 씨앗이 되었던 것 같아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서른세 살. 창원에 살면서 두 번째 아이를 낳은 후다. “어느날 거실에서 빨래를 개다가 베란다 앞을 보니 앞 동의 아파트가 기울어지면서 광활한 사막이 펼쳐졌어요. 그걸 보면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문득 결심했습니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세상에 정해져 있는 당위성이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마침 그날 저녁 아파트 현관에서 문학강좌 안내 전단을 보고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본인 스스로도 작가의 결심과 수업 입문의 동시성에 굉장히 감동한다고 했다.

    습작을 한 지 1년6개월, 1995년 동아일보 중편소설로 등단한다. 다음 해 단편 ‘염소를 모는 여자’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해마다 권위 있는 대한민국 문학상을 휩쓸며 대표적인 여성작가로 자리매김한다.



    ▲ ‘염소를 모는 여자’

    그의 소설은 주로 남녀간의 정념이나 지울 수 없는 사랑과 상처, 결혼이 낳은 불가해한 불행 등을 주제로 하고 있다. 독특한 비유와 어법으로 자신만의 문체를 확립했다. 문장 하나하나에는 낯섦, 섬뜩함, 탈인간적인 가치들이 담겨 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염소를 모는 여자’를 꼽는다. 아파트 안의 닫혀 있는 주부의 삶, 출구가 없고 소외된 여성의 삶과 여성의식을 염소로 형상화했다.

    “90년대 중반은 시대적으로 전환기였고, 새로운 것을 요청하던 시대였습니다. 80년대는 여성적인 감수성을 가진 문체가 놓일 자리가 없었죠. 그동안 억눌렸던 여성이, 언어화되지 못한 여성이 주체가 되어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아파트와 핵가족이라는 제한적 공간에 갇혀 있는 막막한 상황을 말이죠. 저는 제 말을 한 것인데 예상외로 많은 독자들이 작품에 공감했습니다”며 시대상황을 설명한다.

    그래도 아파트에서 염소를 키우는 황당한 설정이 궁금했다. “염소는 가장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가축입니다. 자연상태의 본성, 제도 안에 길들여지지 않는 원초적인 상징입니다. 아파트 단지와 염소를 연결시킨 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멀기 때문에 더욱 강렬한 이미지로 살아났습니다.” 그만큼 충격적이고 사건적인 작품이었다. 모두의 상상력에 금이 가게 만든, 전경린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이다.



    ▲ 작가는 새로운 것을 써야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에 대해 정념(情念) 혹은 귀기(鬼氣)의 문학이라 한다. 작가는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물었다.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갑자기 솟아날 때 놀랍고 이질적이라고 하죠. 떠올라 있는 현실은 누군가가 만든 것이고요. 특히 여성은 남성 중심의 어마어마한 타자성 속에 태어납니다. 그런 무력한 타자로 자랐을 때, 내가 나인 것이 이 세상에 없을 때, 나를 만들어내야 했어요. 물 속에 잠재해 있던 개념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문학이 제 문학이었고, 그것을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다고 생각합니다.”

    ‘소설과 내내 싸우기만 한 것 같았는데 소설을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그. 지난해 현대문학상 수상소감이다. 무슨 일이든 계속 싸우면 힘들고 지친다. 수상작품 ‘강변마을’은 너무 흔한 소재여서 갈등을 많이 겪었단다. “속에서 나오는 대로, 긴장을 버리고 썼어요. 뭐든 새롭게 쓰려던 강박을 조금 놓고 썼던 작품입니다.”

    자연스럽게 작가론으로 이어졌다.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욕망과 동시에 새로워야 한다는 요구가 늘 있습니다.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가, 새롭지 않으면 독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문학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새롭지 않으면 평가받기 어렵습니다.” 작가는 작품으로 현실을 뚫어주어야 하며, 삶의 본질을 바꿔주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란다.



    ▲ 가르치는 것도 즐겁다

    작년부터는 모교인 경남대 청년작가아카데미에서 소설창작을 가르친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생전 처음이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정말 예쁘단다. 오랫동안 전업작가로서 철저하게 혼자였던 그가 제도 안에 묶이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사회 안에서 한 개인으로서 역할과 경험을 받아들이는 게 필요한 시점이 지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인이 제도화된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때 그것이 정말로 온전한 것 아닐까요?”

    두 가지 일을 함께 하는 것은 쉽지 않은 법. 작품을 구상하고 있지만 전업작가일 때보다는 집중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차기작으로 리얼한 구체성과 함께 서슴없는 환상성을 가미한 소설을 구상 중이란다. 자못 기대된다. 아울러, 지역을 소재로 한 창작물이 많이 나와 지역이 중앙문화의 타자가 아닌 주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응원의 말로 겨울 해가 귀산 바다를 붉게 수놓는 해질녘까지 계속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전경린=1962년 함안 출생. 경남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6년 '염소를 모는 여자'로 한국일보문학상, 1997년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로 문학동네소설상, 1999년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으로 21세기문학상, 2004년 '여름휴가'로 대한민국소설문학상 대상, 2007년 '천사는 여기 머문다'로 이상문학상, 2011년 '강변마을'로 현대문학상 수상. 현재 경남대 교양학부 교수.


    글= 이학수·김유경기자

    사진= 성민건기자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이학수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