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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경남다문화가정연대 대표 수베디 목사

“힘내세요! 이주노동자도 활짝 웃는 일터 함께 만들어야죠”

  • 기사입력 : 2012-01-03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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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팔계 한국인인 경남다문화가정연대 대표 수베디 목사가 창원시 의창구 팔룡동 경남이주민노동복지센터에서 상담을 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가족들을 위해 고된 공장 생활은 견딜 수 있어요. 하지만 견딜 수 있다고 해서 의자나 소파에 자야 하는 것은 아니죠. 이주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어요."

    자신의 삶을 땅에 떨어진 밀알처럼 썩어져 가는 인생을 산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희생'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줄 각오가 필요할 만큼 쉽지 않은 선택이다. 자신이 이주노동자의 삶을 살았던 경험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밀알이 된 사람이 있다. 바로 네팔계 한국인 경남다문화가정연대 대표 수베디(39) 목사다.

    수베디 목사는 이주노동자들이 인권침해를 당하는 현장에 직접 달려나가고, 이들의 소송을 직접 나서서 도와주는 등 이주노동자의 '대부'로 불린다.

    수베디 목사는 "1996년 산업 연수생으로 한국땅을 밟아 이주 노동자의 삶을 살았던 경험이 이주 노동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며 "이주 노동자들이 이국땅에서 당한 아픈 경험을 들으면, 1996년 겨울 추위를 참아가며 눈물 젖은 빵을 먹었던 그때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1996년, 한국에 첫발을 내딛다

    수베디 목사는 네팔 트리부원 국립대에서 무역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이후 2년 정도 사업을 했지만 신통치 않았고, 좀 더 발전된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던 중 한국의 산업발전에 대해 듣게 됐고, 산업연수생 제도에 대한 광고를 접하게 됐다. 그리고 산업연수생을 연결해주는 중개인을 만나게 되면서 한국의 문을 처음 두드렸다.

    그는 “장남이라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해서 산업 발전을 이룬 한국행을 결심하게 됐다”며 “이때가 평범한 삶을 꿈꿨던 내가 미지의 세계로 나가는 첫발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열악한 노동현장

    하지만 수베디 목사의 한국행은 첫발부터 삐끗했다.

    산업연수생 중개인은 수베디 목사에게 한국 돈 800여만원을 요구했다. 한국으로 가면 800만원도 금방 갚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수베디 목사는 은행에서 거금을 빌려 한국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선진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수베디 목사의 기대와 달리 한국에서의 일은 끔찍했다.

    수베디 목사가 처음 일한 곳은 대전의 한 비닐공장이었다. 주·야간으로 일하며 쉴 새 없이 일해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무거운 비닐을 옮기고, 포장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밥 먹는 시간도 고작 10분. 별도의 쉬는 시간도 없었다.

    수베디 목사의 한 달 월급은 30만원이었다. 이 중 10만원은 이주노동자들의 도주를 우려해 회사에서 따로 보관했고, 집에 부치는 돈을 제하고 나면 수베디 목사에게 기다리는 것은 처절한 가난뿐이었다.

    이러한 삶을 위해 한국에 온 것이 아니었기에, 수베디 목사는 자신이 선택한 한국행에 한숨만 나왔다.

    그는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브로커의 말만 믿고 한국에 왔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닐 공장의 참혹한 노동현장이었다”며 “비닐 공장은 24시간 돌아가기 때문에 밥 먹는 시간, 쉬는 시간도 고작 10분에 불과할 만큼 이주노동자의 삶은 참혹했다”고 말했다.



    IMF 이후 더 비참해진 노동 환경, 교회 다니며 위안 찾아

    이후 1997년 한국에는 IMF 사태가 터졌고, 수베디 목사가 일하던 공장은 주문량이 급격히 떨어져 임금도 줄어들게 됐다. 당시에는 최저임금제도도 없을 뿐더러 이주노동자의 인권에 대한 사회 보호망은 턱없이 부족해 수베디씨의 삶은 더 비참해져 갔다.

    이러한 삶에 유일한 위안은 휴일마다 찾아간 교회였다.

    이곳에서 수베디 목사는 이주노동자를 위해 인권 운동을 하는 한국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과 만나 이야기하며 한국 이주노동자의 삶에 대해 토론했고, 열악한 이주노동자의 삶을 해결할 방안에 대해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베디 목사는 “한국인들이 IMF로 힘들어할 때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더 비참했다”며 “하지만 당시의 고통과 고뇌는 인권운동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고, 값진 경험이었다”고 설명했다.

    수베디 목사가 일하던 공장은 IMF 때문에 더는 운영이 힘들어졌고, 2년이 채 안 돼 수베디 목사는 네팔로 다시 돌아가게 됐다.

    네팔로 돌아간 수베디 목사는 자신이 힘들었던 시절 자신을 도왔던 사람들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네팔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려 했지만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던 것이다.



    1999년 한국 신학대학원 입학하며 인권 운동가 꿈꿔

    1999년 2월. 수베디 목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대전의 한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수베디 목사는 “네팔로 돌아간 뒤 한동안 많은 생각을 하며 한국에서 있었던 생활을 되짚어 봤고, 내가 가진 소명이 무엇인지 고뇌했다”며 “이때 나를 위한 삶이 아닌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수베디 목사는 신학대학원에 다니며 대전 지역의 이주노동자들을 자주 만났다. 당시 한국은 IMF사태가 끝나자 많은 이주노동자가 들어왔고, 수베디 목사가 할 수 있는 역할도 더 많아져 갔다. 수베디 목사는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며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고 그들과 함께 아픔을 나눴다. 또 병원이나 행정처리 등의 급한 일이 있으면 항상 이주노동자들을 도와줬다. 5년의 세월이 지나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자신이 필요한 곳을 찾았다.

    그는 “2005년 김해에서 풀타임 사역을 시작했고, 특히 김해에는 네팔 이주노동자가 많아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많았다”며 “영어, 파키스탄어, 인도어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여러 이주노동자를 도울 수 있어 더욱 기뻤다”고 말했다.



    한국인 수베디, 이주노동자들 웃으며 일하는 노동현장 바라

    2009년 수베디 목사는 한국으로 귀화했다. 이제 비자문제도 걱정이 없고 이주노동자들의 복지 향상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도 세울 수 있게 됐다.

    수베디 목사는 이주노동자 대부분은 3D 업종에서 위험한 일들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좋아졌지만, 여전히 일부 이주노동자들은 소파나 공장 한쪽 간이침대에서 자고, 컨테이너 박스에서 지내는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간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이주노동자의 상황은 이들을 한국 경제를 이끌어 가는 동반자가 아닌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이방인으로 취급한 결과라고 그는 지적했다.

    수베디 목사는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경제의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들을 한국 경제의 동반자로 생각한다면 좀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이주노동자들도 한국에서 일하는 이상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복지 또한 좀 더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1996년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수베디 목사. 한국에서 그냥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평범한 20대 청년이 이제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소금이 되고자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한국을 사랑한다. 그래서 한국 기업에 상처받은 이주노동자들이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 한국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하지나 않을까 늘 걱정이다.

    수베디 목사는 마음속에 항상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자신의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 이주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말이다. 수베디 목사는 오늘도 작은 희망조차 꿈꾸기 어려운 이주노동자를 찾아가 그들에게 희망을 들려준다. 그는 그들에게 말한다 “힘내세요.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우리 함께 힘을 모아요”라고.


    글=배영진기자 byj@knnews.co.kr

    사진=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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