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9일 (월)
전체메뉴

[사람속으로] 한국난문화협회 이원기 총회장

끌림으로 만난 30년 "난, 널 사랑해!"

  • 기사입력 : 2012-01-17 01:00:00
  •   
  • 한국난문화협회 총회장인 이원기 마산 한일정형외과 원장이 자신의 집에 보관 중인 1400여 개의 난 중에 하나를 들어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이원기 원장이 진료가 없는 틈을 이용해 난을 살펴보고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까지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림 공부에만 매진했던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강권으로 3학년 2학기 때 진로를 수정해 이과공부를 하면서 의과대학을 졸업해 현재까지 32년간 정형외과 의사를 하고 있다. 의사가 된 현재의 모습을 후회하진 않지만 못다한 미련에 그린 그림이 무려 100여 점이 넘는다. 지난 1997년 ‘문학춘추’ 공모에서 수필 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이후 19번째 수필집을 내기도 했다. 취미생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란 전문가로 명성이 높아 전국대회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모든 설명의 주인공은 이원기(67) 마산 한일정형외과 원장. 창원컨벤션센터에서 한국난문화협회 제9대 총회장에 취임하던 지난 14일 그를 만났다.


    이원기 회장이 난을 접하게 된 지도 30년이 지났다. 무릎이 안 좋아 병원을 찾았던 고등학생이 잘 치유되자, 그 학생의 아버지가 감사함의 표시로 전해줬던 것이 보세란이었다. 창원지역의 마사로 난석도 해 주고 기르다 보니 어느덧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난 배양을 취미로 하게 됐다.

    그 이후 수많은 난들이 그의 손에서 죽어갔고 수많은 난들이 그 자손을 넓혀 갔다. 지금은 보세란이 흔하지만, 당시에는 귀한 품종이었기 때문에 애착을 보였으며 지금도 이 회장의 집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 회장이 보세란을 선물받았을 때만 해도 난 붐이 일지 않았다. 가끔씩 거리에서 보이는 난 상인들도 중국란과 일본란만을 취급할 때였다.

    난과의 인연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우리나라 난계의 1세대인 향파 김기용 선생의 강의를 우연히 TV에서 접하게 됐다. 알고 보니 김 선생은 이 회장의 형수와도 친척 관계여서 이 회장이 찾아뵙기도 하고, 김 선생이 직접 마산까지 오기도 하면서 난에 대해 알아나갔다. 23년 전에 생긴 마산애란회에도 입회하면서 중국란과 일본란에 이어, 당시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가르쳐준 한국란에 대해서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애란가들은 언제부터 난에 미쳤는가가 중요하지, 언제 난을 취미로 기르게 되었는가는 그렇게 중요치 않다고 말한다.

    이 회장이 난에 미친 시기는 언제였을까. 16년 전 그는 서울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난문화 대상을 수상했다. ‘동광’을 10년 동안 키워 한 화분당 꽃을 다섯 개씩 단 동광 2화분을 출품해 대상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이로 인해 이 회장이 난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일본인들도 한국란계를 인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애란계에 빠져들게 된다. 그는 집에 있는 1400여 난 중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한 동광이 제일 소중하다고 말했다.

    보통 애란인들은 난을 어디에 둘 것인지 고민하고 집을 짓는데, 이 회장은 그렇게 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현재 병원과 같은 건물에 있는 집을 지었을 당시만 하더라도 난에 빠져있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의 집 구석구석에는 난이 자리하고 있다. 자고 있는 침실과 베란다에도 난이 있다 보니 가족들은 “난이 가족보다 더 소중하냐”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기도 한단다.

    초창기 난을 키우면서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난도 생물이다 보니 그가 제공한 환경에 적응해 나갔다. 그렇다 보니 지금은 난에 시간을 투자하는 날도 있지만 없는 날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회장은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다든지 기온의 변화가 있을 때는 집안 구석구석을 챙기며 난을 돌본다. 처음에는 열정만으로 난에 대해 도전했지만 이제는 중국과 일본의 난 세계를 보며 비교를 많이 한다.

    이 회장은 “중국란은 향이 있고, 150~200년의 역사를 지닌 일본란은 향이 없는 대신 잎의 색깔과 색에 중점을 뒀다”며 “30여 년의 역사밖에 안 된 한국란은 향이 거의 없어 중국에서 볼 때는 가치 없는 풀에 불과하지만 난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난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에 큰다”는 말이 있듯이 관심이 많으면 좋은 꽃을 피우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러한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그래도 난을 가꾸며 대화하다 보니 겉보기엔 비슷해 보이는 수많은 난 중에서 자신의 난이 어떤 것인지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난 도둑들은 난을 훔쳐가더라도 새 촉이 올라온 이후나 일본 등에서 판매하지, 국내에서는 쉽게 판매를 못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난을 여자에 비유했다. 이 회장은 “수많은 여성 중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에게 다른 여성과 다른 조그마한 차이가 있잖아요. 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면 아는 만큼 약간의 차이가 보이는 거예요” 하며 껄껄껄 웃었다.

    “사람보다 난을 더 좋아했죠. 이유는 말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끌림이라고 할까요.” 인터뷰가 중반을 넘어서자 그의 이야기는 흥을 더했다.

    이 회장은 “난은 잎도 좋고 꽃도 좋은 모든 것을 갖춘 자연의 축소판”이라며 “바라면 바라는 만큼 변화가 무궁무진해 거기에 희열을 느끼고 열광할 수밖에 없다”고 난의 매력을 소개했다.

    이 회장은 그림도 그렸고, 수필가이기도 하며, 골프도 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했다. 이 중 현재 그의 머릿속에 비중을 제일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난이라고 했다.

    그는 “난에 대해 입문한 걸 후회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을 보니 행운인 것 같다”며 “아마도 숨을 쉬는 한 옆에 난이 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어떤 것이 좋은 난인지 우문을 하나 던져 봤다. 이 회장은 “어떤 난이 좋은지 말하기 힘들다”고 전제한 후 “아무래도 좋은 난이 되려면 원예성, 작품성, 희귀성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누구든지 키워서 잘 커야 하고, 꽃도 피워야 하며, 희귀해야 값어치가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 회장은 30여 년 난을 키우면서 사회에서 받은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난에 대한 사랑을 통해 행복하고, 행복하기 위해 사랑한다”면서 “서양인은 부모자식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남녀 간의 사랑, 인류애, 신에 대한 사랑 등 다섯 가지의 사랑이지만, 동양인은 신에 대한 사랑이 없는 대신 난과 돌에 대한 사랑이 있어 동양인의 사랑이 훨씬 넓고 보편적이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한국난문화협회 총회장의 2년 임기가 시작된 만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물었다. 이 회장은 “난문화협회는 전국 16개 광역 시·도에 150여 개의 단위 난 단체에 등록된 회원이 2000여 명에 달하는 전국단위 최대의 대한민국 동양란 취미단체”라며 “형식이나 격식, 정관을 정비해 전국 단위 모임을 수성해 나갈 것이며, 2년 더 총회장을 연임하는 기회가 온다면 국제 교류 등에 적극 나서는 한편, 다른 난 단체와도 상생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 회장은 “난은 생명력이 강하다”면서 “초보자들이 너무 많은 관심을 가져서 죽이기도 하는 만큼 적당한 관심을 갖고 난을 키워 보라”고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글= 권태영기자 media98@knnews.co.kr

    사진= 전강용기자 jky@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권태영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