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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5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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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35) 사진작가 리영달

난 영원한 진주사람 사진인생 50년 고향사랑 담아왔지

  • 기사입력 : 2012-03-26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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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가 리영달의 빛바랜 흑백사진에는 어린시절 고향의 정겨움이 묻어난다. 최근에는 디지털카메라로 연잎의 이슬과 홍매화를 담고 있다고 한다. 도내 리얼리즘 사진의 개척자인 리씨가 자신의 대표작품인 ‘연륜’, ‘맹투’, ‘봄바람’ 등을 펼쳐놓고 사진 속 주인공이 됐다.
     

    소싸움 사진을 50년 넘게 촬영한 작가, 진주 지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해온 ‘영원한 진주사람’이자 지역사랑을 실천하는 문화운동가. 도내 리얼리즘 사진 1세대의 마지막 생존작가라고 할 수 있는 사진작가 리영달(78)씨를 만났다.

    그의 소싸움 사진은 대한민국 정부의 해외 홍보 팸플릿에 실려 전 세계에 소개됐다. 작품 ‘봄바람’은 일본의 사진잡지 ‘아사히카메라’에 두 번이나 특집으로 다뤄지기도 했다. 지역 현대사진 1세대의 마지막 주자로서, 사진으로 세상을 바꾼 예술인으로 오래 기억되고 싶다는 그.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나온 말은 “지역사랑”. 진주문화사랑모임 이사장직을 15년째 맡고 있다. 김시민 장군 공신교서를 일본에서 되찾아 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등 지역문화운동에도 적극적이다. 서울대 치과대학을 나와 치과의사가 본업인 그는 오후 3시면 진료를 접는다. 나머지 시간은 작품활동과 지역사랑 실천을 위해서다.

    한국사진작가 100인에 선정됐고, ‘한국사진의 재발견’ 사진집에 작품이 수록됐다. ‘한국현대사진 60년’ 초대작가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팔순을 앞두고 있지만 지금도 매주 1~2차례 새벽출사를 나가는 영원한 청년 사진작가, 사진작가의 철학을 강조하는 그에게서 사진 50년에 얽힌 이야기와 작품세계를 들었다.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그림에 소질이 좀 있었다. 대학 다닐 때는 잡지에 만화를 그려 학비를 보탤 정도였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다가 삶의 진실을 기록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진을 시작했다. 라이카 카메라 마니아인 대학은사의 영향을 입었다. 결정적으로 대학 3학년인 1957년 덕수궁현대미술관에서 세계적인 전시인 ‘인간가족사진전’을 보고나서다. 빛으로 빚은 영상언어를 본 감동이 사진으로 방향을 바꾸게 됐다. 지금도 그 감동이 생생하다.”

    -그 당시는 사진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쉽지 않았을 때다. 어떻게 배웠나.

    “1959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 진주로 돌아와 치과를 했다. 고향사람들의 참모습을 찍어보자는 생각에 사진기를 잡았다. 사진을 배울 데도 없어 일본책을 구해서 독학했다. 그뒤 경남 리얼리즘 사진의 선구자인 김종태씨, 사진 메커니즘의 장인인 이균무씨와 교류하면서 실력을 쌓아갔다. 당시(1962년) 진주아마추어사진가 모임인 진주사진클럽을 만들어 재미를 붙였다.”

    -이후 사진활동을 소개한다면.

    “1968년 사진작가협회진주지부를 창설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는 개천예술제 발전을 위해 필요했다. 개천예술제 사진공모전 사진부장을 맡아 공모전을 10여년 주관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경남도전 운영위원장도 했다. 지금처럼 경남사진대전으로 분리되기 전이었다.

    -50년을 넘게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기억에 남는 작품을 소개한다면.

    “‘봄바람’이다. 카메라를 막 잡은 1959년 4월 초 진주 서장대에 봄놀이 나온 주민들의 흥겨운 모습을 담았다. 흥에 겨워 남녀가 껴안는 순간을 포착했는데, 일본의 대표적 사진잡지인 ‘아사히카메라’에 1981년, 1985년 두 번이나 한국 대표작가로 소개됐다. 소박한 사람들의 꾸밈없는 희로애락을 잘 표현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이 사진은 다수 외국사진전에서도 입선했다.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도 찬사를 받았다. 사천 곤양의 한 농촌에서 아들이 아픈 아버지를 업고 바람을 쐬러 나오는 장면인데, 아들의 애뜻한 효심을 담았다. 아마도 소싸움 사진이 제일 많이 알려졌지. 1962년 찍은 ‘맹투(猛鬪)’는 동아콘서트 호주국제살롱 등에서 입상했다. 1986년 문화부 해외홍보지 ‘SEOUL’에 소싸움 연작작품이 ‘투우-코리안스타일’이란 제목으로 전 세계에 소개됐다. 봄바람과 맹투는 경남도립미술관 영구소장 작품에 선정됐다.”

    -특별히 소싸움을 많이 찍는 이유라도 있나. 어려움은 없었나.

    “소싸움은 진주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이다. 옛날에는 요즘처럼 망원렌즈도 없었고, 하이스피드 촬영기능도 없었다. 싸움소 옆에 다가가서 사진을 찍어야 했다. 격렬한 싸움을, 흔들림 없이 찍는 게 기술이다. 맹투 같은 작품은 기적이다. 이 사진에서 승자와 패자의 눈표정이 다르다. 남강 둔치의 흰 모래밭에 흰옷을 입은 관중과 흰옷을 입은 소주인이 잘 나타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한테 밟혀 죽을 고비도 여러 번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필름사진이 세월이 가면서 색이 바래 못 쓰게 됐다. 소싸움 사진 중 백사장에서 강으로 들어가 싸우는 사진은 겨우 살려냈다.”

    -작품세계에 변화가 있다면. 요즘은 어떤 사진을 주로 찍나.

    “예전에는 리얼리즘, 다큐멘터리 사진을 했지만 이젠 자연이 만든 창조물에 초점을 두고 있다. 남들보다 일찍 디지털카메라 환경에 적응했다고 자부하는데, 디지털카메라를 갖기 시작한 2003년부터 풀이나 꽃사진을 주로 찍는다. 죽고 나면 내 옆에서 제일 가까이 할 것이 풀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풀꽃들이 묘소를 지킬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연잎에 모인 이슬이 만들어내는 형상이 재미있어 많이 찍었다(※연잎 위의 이슬이 고래, 멧돼지, 낙하산 등 다양한 모습을 연출한 사진을 보여준다). 홍매화도 관심있게 보고 있다.”

    -고향사랑이 남다른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집이 가난해서 대학을 어렵게 다녔다. 마지막 등록금이 없어 애를 태우자 고향분들이 모아줘 무사히 졸업했다. 다 진주사람들의 은덕이다. 진주를 지키고 진주를 사랑하는 것이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나는 진주인으로 사진을 시작하고 진주사랑으로 마무리하려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진주소싸움도 그러한 맥락에서 아직껏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치과수입의 30%는 지역봉사에 써 왔다.”(※그는 김시민 장군 공신교서 환수운동, 진주걸인·기생 독립단 만세운동 재현에 힘썼다.)

    -경남사진계는 지금 경남사진대전 수상작 선정 부정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원로작가로서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 달라.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은 휴대폰으로도 800만화소 사진을 찍는 시대다. 사진작가라면 남다른 철학이 있어야 한다. 비싼 카메라 메고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진은 빛으로 빚은 시(詩)고, 글이자, 사회의 얼굴이다. 사진작가는 사회에 기여해야 하고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사진이 세상 발전의 모체라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 리영달= ▲1934년 진주 출생, 서울대 치과대학 졸업 ▲진주시문화상(1980) 경남사진문화상(1995) 대한민국예총예술문화상 대상(2004), 올해의 치과인상(2011) ▲개천예술제 대회장· 논개제 제전위원장·이상근기념사업회 이사장·정명수선생 100주년 기념사업회장·진주남강유등축제제전위원장 역임 ▲국내외 사진공모전 및 살롱 약 50회 수상 ▲작품집 ‘나의 고향시리즈 1, 2집’, 개인전 3회 ▲(사)진주문화사랑모임 이사장, 한국사진작가협회경남지회 고문, 전국 영상동인회 고문, 진주일요사진클럽 고문, 경상대 사진부 동아리 focus 고문


    글= 이학수기자 leehs@knnews.co.kr

    사진= 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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