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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5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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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36) 서예가 송포 최명환

붓글로 녹여냈다, 산의 패기와 바다의 편안함
고교 때 인연… 1960년대 교사된 후 본격 ‘서예앓이’
방학 땐 서울에 하숙방 얻어 정도준 선생 사사

  • 기사입력 : 2012-04-23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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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예가 송포 최명환 선생이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최명환 선생이 작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높은 산을 만나면 경외감이 든다. 산이 높아서 자연 굴복되지만 그 산의 깊은 계곡과 탁월한 산세가 전해주는 포용과 안식, 묘미가 사람을 매료시키기 때문이다.

    사람도 곧잘 산에 비유된다. 학식이 높거나, 덕망이 깊거나, 인품이 고매하거나, 예술적 깊이가 탁월하거나…. 그런 흔치 않은 사람이 산에 비유되니 마땅히 ‘인산(人山)’으로 예우받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서예가 송포(松圃) 최명환(64) 선생은 이 지역에서 높은 산이다. 아니 ‘인산(人山)’이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학식높은 입담이나, 가슴깊이 내재해 있는 덕망에서 우러나오는 눈빛과 웃음, 붓을 잡고 휘호하는 예술적 깊이와 자태에서 ‘높이가 있고, 깊이가 있는 인산(人山)’의 풍치를 그대로 뿜어낸다.

    “아직도 일가(一家)를 이루지 못했다”고 낮추면서 기자와의 만남을 몇 차례 사양했던 송포 최명환 선생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 142-24 4층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어렵게 만나 선생의 ‘서력(書歷)’에 담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삶의 제1순위, 오로지 서예

    최 선생의 고향은 남해군 삼동면이다. 선생이 처음 붓을 잡은 것은 남해 섬마을 초등학교 특별활동 서예시간이었다. 그러다 부산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청남 오제봉 선생에게 배우면서 서예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후 1960년 말 교사가 되면서 서예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었고, 서울서 자신의 진가를 알아본 스승을 운명적으로 만나면서 서예술의 깊이를 더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최 선생의 스승은 바로 소헌 정도준 선생이다. 정도준 선생은 故 유당 정현복 선생의 아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붓을 잡아 세상을 놀라게 했던 정현복 선생의 아들인 정도준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으니 참 행운도 따랐다는 게 최 선생의 기억이다.

    서예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던 최 선생은 31세 겨울방학 때 서울서 진주 출신인 정도준 선생을 무작정 찾아갔다. 자신을 받아준 스승에게 한자라도 더 배우기 위해 겨울방학뿐 아니라 여름방학 등 10년 동안 서울 스승집 인근에 하숙방을 얻어놓고 배웠다. 고향사람이 서예를 배우기 위해 천리길을 마다않고 찾아온 것에 탄복한 스승은 1주일에 3일을 지도키로 했다가, 밤새 글을 쓰고 땀 흘리는 최 선생의 열정에 또 탄복해 매일 지도하기도 했다.

    방학이 끝나서도 더 배우기 위해 여러 가지 서체의 작품을 혼자 써서 우편으로 스승에게 발송해 지도받고, 우편으로 회신받았다. 그때는 최 선생의 삶에 서예가 오로지 제1순위였던 것이다.

    최 선생은 “옛날에는 중앙집중식 사고로 인해 지방과 중앙의 문화격차가 너무 커 지방 예술발전이 어려웠고, 그 문화적 격차를 줄이기 위해 내가 한번 시금석이 돼 보고 싶었다”면서 “그 같은 열정 때문인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고 주말 서울의 전시장을 찾아 대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작품을 연구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중앙무대 우뚝 선 뒤 경남서단도 창설

    그렇게 기를 쓰며 배웠던 노력 때문인지 최 선생은 국전 초대작가가 됐고, 또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로서 작품을 발표하면서 중앙무대에 우뚝 설 수 있었다.

    자신의 뜻을 어느 정도 이뤘다고 생각한 최 선생은 이후 지방무대로 돌아와 역량있는 작가들을 규합해 지방의 새로운 서예문화를 선도하기 위해 ‘경남서단’을 창립하기로 결심했다.

    1993년에는 경남서단창설준비위원장을 맡아 작가들에게 서단의 필요성을 설명했고, 드디어 1994년 1월 11일 경남서단 창립총회에서 초대회장에 추대돼 그해 12월 3일 경남서단 첫 창립전을 이끌어냈다. 이후 최 선생은 2대와 3대 연속해서 경남서단 회장에 올라 서단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역할을 하면서 ‘글 쓰는 사람들의 단상’으로서의 서단을 만들어냈다.

    서울에서의 열정, 지방에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최 선생. 어떤 일을 만들어내는 기획력이 뛰어나기 때문인지 그는 ‘최총명’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또 그 일을 치러내는 능력 때문인지 ‘불도저 최’라는 별명도 함께 갖고 있다.

    최총명과 불도저 최의 리더십이 서예계와 미술계 전체에 알려지면서 외부 활동이 부쩍 많아졌다. 최 선생은 지난 1997년 마산미술협회장에 올랐다. 리더십을 알아본 주변에서 직책을 맡아달라고 강력 요청했기 때문이다. 또 2001년에는 경남미술협회장을 맡아 3년간 활동했고 이후 3년 더 연임하기도 했다. 경남서단 회장을 맡으면서 서울 근묵서학회 회장도 맡아 전국의 서예동향을 주도하기도 했다. 경남미협회장 시절에는 당시 김혁규 지사를 만나 미술인들의 소망인 경남도립미술관 건립을 역설했는데, 공교롭게도 여러 사람들이 미술관 설립 당위성을 건의하면서 미술관이 만들어지는 기쁨도 맞았다. 2006년에는 경남국제아트페스티벌(GIAF)의 기초를 만들었고, 이를 받은 차기 미술협회장인 성낙우 회장이 성공적인 대회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패기 있는 서예, 편안한 서예를 향한 열정

    서예술은 인생과 같다는 게 최 선생의 생각이다. 인생은 자유스러워야 한다. 그래서 최 선생의 작품에 스며 있는 기풍은 언제라도 무리하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붓으로 휘호한 작은 글씨 하나도 큰 산과 같이 보이게 하지만 먹물이 퍼져서 화선지에 빠질 때는 넓은 바다를 느낄 수 있도록 한다. 붓에, 글씨에 담긴 메시지는 인생의 고진(苦盡)을 담고 있지만, 먹이 퍼진 화선지에 드러난 작품에는 감래(甘來)가 진하게 묻어 있다.

    높은 산에서 불어오는 힘과 패기, 넓은 바다에서 포용되는 편안함. 최 선생은 그런 힘과 부드러움을 작품 속에 함께 녹여내면서 붓과 철학과 풍체의 작용과 반작용의 물리적 균형을 표출해내고 있다.

    억지로, 가식적으로, 뭔가 있어 보이려는 듯이 쓰는 화학적 서체를 경계하면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패기와 포용력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 선생은 “아직도 완성된 게 아니라오”하며 손사래 친다.

    최 선생은 예서를 즐겨 쓰면서 전서를 병행하고 있다. 예서 가운데서도 목간체를 즐겨 쓰는데, 일반 애호가들은 최 선생의 예서체를 특히 좋아한다. “작품의 화면을 채울 수도 있고,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서체는 예서와 전서가 가장 뛰어나다”고 최 선생은 설명했다.

    한문을 즐겨 써 온 최 선생은 최근에는 한 작품 속에 한문과 한글을 병행하면서 누구나 알기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을 많이 쓰고 있다. 아무리 좋은 서예작품도 보는 이들이 뜻을 모르거나, 읽기가 어려우면 서예인 자신만의 전유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 최 선생을 잘 아는 애호가들은 “송포 선생이 쓴 글은 편안하다. 억지로 비틀고 삐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래서 가까이 놓고 감상하기에 좋다”는 반응이다.

    그는 송나라 때 나대경(羅大經)이 지은 ‘학림옥로’에 나오는 고사 ‘승거목단 수적석천(繩鋸木斷 水滴石穿)’이라는 문구를 즐겨 쓴다고 한다. 새끼줄도 톱으로 쓰면 나무를 자를 수 있고, 물방울도 오래 떨어지면 돌을 뚫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최 선생은 “천재보다는 꾸준히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 연마하고 또 연마하면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후학에게도, 나 자신도 늘 강조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요한 아침에 정갈한 마음으로 즐겨 글을 쓴다는 최 선생. 후학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요청에 ‘온고지신(溫故知新)’ 속에 답이 있다며 옛것을 익히고 또 익혀서 새것을 찾을 것을 강조한다. 아마도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말일 게다.

    최 선생은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창조하는 일에 마지막 열정을 바치겠다고 했다. “안 될까 싶어 고민”이라는 최 선생이지만 그가 가진 눈빛의 정열 속에는 이미 자신만의 서체를 다 만들어간다는 듯이 이글거리고 있다.


    글= 조윤제기자 cho@knnews.co.kr

    사진= 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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