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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⑪ 송창우 시인이 찾은 고성 상족암

퇴적암 위에 서서 1억년 전의 파도소리를 듣는다
공룡발자국에 고인 1억년의 시간이 발을 적신다

  • 기사입력 : 2012-08-16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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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상족암. 상족암으로 가는 길에는 헤아리기 힘든 태고의 시간들이 첩첩 쌓여 있다.
    상족암으로 가는 길 풍경.
    목재데크를 걸어가면 상족암이 나온다.
    상족암 해식동굴에선 푸른 바다가 보인다.
    고성 학동마을 돌담길.
    계승사의 물결무늬 화석.


    10년 만에 상족암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1억 년을 쌓아올린 상족암 지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10년이면 제 인생에도 지층 하나가 생겼을 것 같습니다. 그 시간의 지층 아래에, 마치 공룡 발자국처럼 묵직한 생의 발자국 몇 개도 찍혀 있을 테지요. 눈부신 또는 아픈 생의 한순간이 흔적으로 남아 있을 테지요. 10년 전의 제 발자국 몇 개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비틀거리지 않고 잘 걸어왔는지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상족암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시간의 지층들을 탐색하며 백악기로 가는 길입니다. 백악기는 1억4000만 년 전에 시작되어 6500만 년 전까지 이어집니다. 상족암으로 가는 길에는 헤아리기 힘든 태고의 시간들이 첩첩 쌓여 있습니다. 한갓 몇 백만 년밖에 안 된 인류의 역사란 이곳에선 지층 위에 살짝 덮인 먼지 같은 것입니다. 하물며 잘 살아야 80여 년인 한 사람의 생이란 얼마나 찰나 같은 것입니까?

    자연은 돌에 역사를 새깁니다. 하나의 돌 속에는 몇 천만 년 혹은 몇 억 년의 시간들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돌은 단단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퇴적암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편년체의 역사책입니다. 상족암 가는 길에는 그렇게 자연이 연대기로 기록해놓은 수천수만 권의 책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한 페이지에는 이런 시도 한 편 쓰여 있습니다.



    아기공룡이 뛰놀던 바닷가

    공룡 발자국 선명한 퇴적암 위에 서서

    1억 년 전의 파도 소리

    듣는다

    아아 제천에서 원주까지

    천등산에서 치악산까지

    나는 무슨 꿈꾸며 걸어다녔을까

    청량리 역에서 첫걸음 내디딘

    서울살이의 내 발자국은

    지금 어디쯤에서

    비바람에 지워지고 있을까

    다가올 내 운명

    가늠도 못하면서

    아기공룡 발자국 화석 위에

    내 작은 발자국 놓아본다.

    - 오탁번 시 <아기공룡 발자국> 부분



    오탁번 시인이 상족암 바닷가를 다녀가며 쓴 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상족암 가는 길의 너른 암반들에는 커다란 공룡 발자국들이 찍혀 있습니다. 발자국의 대부분은 초식공룡인 브라키오사우루스와 이구아노돈의 것입니다. 발자국들 뒤에는 아기공룡의 것인 듯한 작은 발자국들도 있고, 저만치 슬금슬금 아기공룡을 뒤따라왔을 무서운 육식공룡의 발자국들도 있습니다. 지상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긴 하루는 어떤 하루였을까요? 어떤 운명의 순간이었을까요? 오탁번 시인처럼 공룡 발자국 속에 나도 한 발을 슬쩍 놓아봅니다. 발자국에 고여 있는 1억 년의 시간이 발을 적십니다.

    상족암 가는 길에서 만난 또 하나의 인상적인 풍경은 지층의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나무들입니다. 나무들은 말랑말랑한 시대의 지층을 파고들거나 지층과 지층 사이의 층리를 뚫고 들어가 뿌리를 내립니다. 그리곤 자신의 몸속에 아득한 시간의 지층들을 재현해 냅니다. 이렇듯 지층을 파고드는 것은 나무들만은 아닙니다. 바람도 바다도 때론 쓸쓸한 기억들도 아득한 시간의 틈새를 파고듭니다.

    상다리를 닮았다고 이름 붙여진 상족암은 그렇게 지층과 바람과 바다가 함께 만들어낸 신의 밥상입니다. 자연의 걸작입니다. 바위의 견고한 시간들을 녹이며 바다가 만든 해식동굴에 들면 빛과 어둠이 만드는 천혜의 비경이 펼쳐집니다. 검은 지층의 액자 사이로 눈부시게 푸른 바다, 병풍바위에 펼쳐진 주상절리의 흰 절벽, 바다 건너 사량도 지리망산의 능선들, 파도가 들려주는 옥녀의 슬픈 이야기, 동굴 가장 깊은 곳 선녀탕에 살고 있는 물고기 한 마리. 이곳에선 모든 풍경들이 신화적입니다.

    상족암을 떠나 돌아오는 길엔 하일면 학림리 학동 마을에 잠시 들렀습니다. 시간의 지층은 학동 마을의 담장에도 펼쳐집니다. 층층 담장 너머 오래된 고택이 있고, 텃밭이 있고, 방앗간이 있는 곳. 구불구불 담장을 돌아나가면 실개천이 흐르는 곳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고, 이마에 굵은 나이테를 새긴 할머니들이 고구마 순을 다듬고 있는 곳. 이곳은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시간의 고향입니다.

    학동의 돌담장들은 300년 전쯤 만들어졌는데, 뒷산에서 나는 점판암의 납작한 돌로 쌓아올린 참으로 단아한 돌담장입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느림의 미학에 빠져보고 싶다면 학동 돌담길을 천천히 거닐어 보십시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나오면 분주했던 마음에도 좀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여행을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고성군 영현면 대법리 금태산에 있는 계승사입니다. 금태산은 태조 이성계의 설화가 깃든 산이고, 절은 산의 7부 능선쯤 백악기의 지층들이 둘러싼 바위틈에 있습니다. 백악기엔 이 절이 앉은 땅도 호숫가였던 모양입니다. 공룡 발자국은 이곳에도 선명히 찍혀 있고, 대웅전 옆으로 길게 누운 암반에는 1억 년 전의 물결이 아직도 일렁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1억 년 전의 빗소리를 듣고 싶다면 대웅전 뒤편으로 난 비탈진 계단들을 올라가 보십시오. 거기 빗방울 화석들이 있습니다. 빗방울 자국도 화석이 된다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어쩌면 어느 날 우리들이 흘렸던 눈물방울들도 화석이 되어갈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슬픔은 오래 남는 것이니까요.

    빗방울 화석 옆에 쪼그리고 앉았는데, 그대로 나도 화석이 되어볼까 싶었는데, 계승사 주지스님이 저녁 예불을 알리며 법고를 두드립니다. 백악기를 끝으로 멸종당한 뭇 생명들을 위로하면서 운판과 목어와 범종 소리가 이어집니다. 이제 다시 신생대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글·사진=송창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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