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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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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40) 극단 장자번덕 대표 이훈

내 연극의 출발점은 역사와 전통
신념이 있으면 불가능이란 없다

  • 기사입력 : 2012-08-27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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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훈호 장자번덕 대표가 사천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객석을 배경으로 무대에 앉아 있다. 이 대표는 “연극은 인생을 살아가는 수단이지 목표는 아니다”라며 아름다운 사람이 목표라고 말했다./김승권 기자/



    이훈호 대표는 우리민족의 전통에 기반한 연극을 지향했다. 우리 장단을 갖고 리듬과 호흡을 익히고, 말이나 신체가 우리 전통에 기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자신의 연극 지향점을 구현한 대표작으로 ‘태’(사진 위)와 ‘바리, 서천꽃 그늘 아래’ 두 작품을 꼽았다.
    이훈호 대표가 ‘바리, 서천 꽃 그늘 아래’에 사용된 호랑이 소품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천의 극단 장자번덕 이훈호(47) 대표는 천생 연극인이다. 그의 인생 자체가 연극처럼 느껴진다.

    그가 극단의 대표가 된 지는 14년 남짓 되지만 연극 인생은 경상대학교 입학과 함께 시작된다. 지난 1984년 대학 극예술연구회에 들어간 게 연극인생의 시작이다. 그는 대학을 입학한 지 10년 만에(1993년 8월) 졸업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90년부터 92년까지 진주 문화단체 ‘우리살림들소리’에서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어 93년 진주에 있는 극단 현장에 들어가 배우 활동을 시작했으며 98년 말까지 몸을 담았다.


    98년 11월 1일 그는 독립한다. 얼핏 무모한 짓으로 보였다. 고향인 사천 곤명면 오사마을 언덕에 비닐하우스를 치고 연습실을 만들었다. 극단 명칭 ‘장자번덕’은 ‘큰 부자가 사는 동네의 높은 언덕’이란 뜻으로, 창단 때 공연장과 연습장이 있던 곳의 지명이다. 독립한 계기에 대해, 그는 “한마디로 의욕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극만 해보자. 연극을 삶의 수단으로 살아보자고 결심했다”고 했다.

    창단 배우 11명과 시골에서 농사를 같이 짓고 집단거주하면서 극단을 운영해 갔다. 그는 “단원들이랑 배추도 심고 같이 노동하고 먹고 자고 연극연습도 실컷 하고 재미있었다”고 회상했다.

    1999년 1월부터 본격적인 연극 작업을 시작, 그해 5월 9일 창단공연작으로 ‘태’(오태석 작)라는 작품을 올렸다. 연출은 대학 세 해 후배로 현재 극단예도 무대감독을 하고 있는 심봉석 씨가 맡았으며, 그는 단역배우로 출연했다. 창단 첫해 장자번덕은 25회나 공연을 했다. 2001년도에는 더 살벌하게 강행군, 연간 37회 공연을 했다.

    그가 연출을 시작한 것은 2000년부터라고 했다. 상임연출인 심봉석 씨가 연출을 모두 맡기엔 힘들어 그 틈을 메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작품 연보를 보면 본격적으로 연출을 시작한 건 2002년부터로 나타난다. 2002년 3월 1일 사천문화예술회관이 개관기념으로 무대에 올린 ‘홍동지는 살아있다(김광림 작)’가 그의 첫 연출작으로 되어 있다.

    장자번덕은 2002년부터 경남연극제 경연에 나가 그해 단체장려상과 분장상을 탔고, 이듬해인 2003년 다시 단체 장려상을 탔다.

    시골에서 배우들을 모아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면서 극단을 이끌어 가는 게 쉽지 않았다. 적자를 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는 “2004년은 극단이 굉장히 어려울 때였다. 시골서 배우를 불러 모아 열정 하나로 공연을 올린다는 게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고향마을에서의 활동은 5년 만인 2003년에 막을 내렸다.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연극을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2003년 사천읍에 소재한 사천예술촌에서 잠시 머물면서도 계속 연극을 만들었다. 2003년과 2004년 그가 연출한 작품은 토선생전(안종관 작), 하녀들(장 주네 작), 너도 먹고 물러나라(윤대성 작) 등이다.

    그는 2005년 10월 1일 현재 극단 장자번덕의 공연 연습장이 있는 사천시 옛 궁지동 동사무소로 이전했다. 그해 창단 공연으로 올렸던 ‘태’라는 작품을 이 대표 연출로 재해석해 경남연극제에 출품, 단체 대상을 받았고 동시에 연출상, 연기상도 함께 받았다.

    하지만 더 이상 소속 배우와 함께 갈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워져 2006~2008년까지 대표만 있는 극단을 운영한다. 그 3년간 소속 배우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작품을 올렸다. 그가 첫 배우활동을 했던 극장 현장과 옛날 극단 단원 등을 캐스팅해 연극을 만들었다. “극단 간판 아래 저와 집사람만 있었다. 소속 배우는 없었지만 작품을 열심히 했다. 한꺼번에 연출을 두 개(극단 현장과 장자번덕)씩 하면서 돈이 모였다. 연극하면서 진 빚 7000만 원을 그때 다 갚았다”고 말했다.

    그는 2009년 창단 10주년을 맞아 배우를 다시 모집하고 새 단원들과 극단 운영에 들어갔다. 그해 경남연극제서 단체 금상, 연기대상, 신인연기상, 무대 예술상을 받았다. 이어 2010년에는 경남연극제 단체은상, 우수연기상을 받았다.

    드디어 2011년 열린 제29회 경남연극제에서 ‘바리, 서천 꽃 그늘 아래’(정가람 작)란 작품으로 그는 큰 상을 휩쓸었다. 경남연극제 단체 대상, 연출상, 우수연기상, 무대예술상 등 4관왕에 올랐고, 전국연극제에 경남 대표로 나서 대상인 대통령상과 연출상, 무대예술상을 받았다.

    그는 “전국연극제 대통령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제가 가고자 한 길이 틀린 건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작년에 언론사 인터뷰 들어온 거 다 끊었다. 한때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모자라는 건 자기가 잘 안다”고 말했다.

    그는 상이 준 의미에 대해 “내가 틀린 게 아니었구나”라는 말을 몇 차례 반복했다. 그 말에서 한 연극쟁이의 고집스러움과 외로움 그리고 자부심이 느껴졌다. 산속에 들어가 비닐하우스 치고 새로운 작품을 실험하고 연습하고, 극단 소속 단원들이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고, 전국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타고…. 한 예술인의 굴곡 많은 스토리가 인간극장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경남연극제 대상, 전국연극제 대상 등 큰 상을 잇따라 타면서도 언론과 접촉을 피하고 작품활동에 집중한 데 대해 “상이 주는 흥분에서 빨리 벗어나고자 (그 분위기에서) 스톱했다. 하던 작업은 그대로 연결된다. 작업은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 연습이 있고 공연이 있고 질문이 있다. 연습과 공연의 반복이다”고 말했다.

    극단은 이제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그는 2010년과 2012년 잇따라 지자체에서 공연 우수단체에 지원하는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사업’의 지원 대상(한 번 선정되면 2년간 지원되며, 올해 공연 지원금으로 7000만 원 지원 받음)’에 뽑힘으로써 극단을 운영하는 데 숨통이 트였다.

    “지금은 극단이 자리가 잡히고 있다. (공연장 상주단체 지원 대상에 선정됨으로써) 극단이 자리를 잡는 데 5~6년이 당겨졌다. 올해부터 단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있다. 간헐적으로 지원되는 무대지원 기금이나 문예진흥 기금으로는 붙박이 단원을 데리고 갈 수 없다.”

    자신의 연극에 대해 설명할 때 그는 ‘역사, 장단, 호흡, 공간, 쉼, 여백’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연극은 출발할 때 역사속 행위, 역사속 전통, 선조들이 가진 전통에 대해 인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 장단을 갖고 리듬과 호흡을 익히고, 말이나 신체를 우리 전통에 기반을 두고 회복하는 데 주력한다. 그 원리를 토대로 동시대 감각을 어떻게 살릴까 고민한다. 민족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연극을 구축해보자. 그게 마지막 목표다”

    그는 이 같은 자신의 연극 지향점을 구현한 대표작으로 ‘태’와 ‘바리, 서천 꽃 그늘 아래’를 꼽았다.

    그는 “한 배우가 되고 연출가가 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신념이 없으면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여기 사는 사람들이 자기 하고 싶은 것 하고 세상에 주눅드는 건 없다. 제가 생각하는 연극세계를 튼튼히 구축하고 좋은 작품을 만들면 먹고사는 것도 해결되지 않나. 그게 제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글= 이상규 기자 sklee@knnews.co.kr

    사진= 김승권 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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