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로 유명한 하동 북천역 철길 옆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가 달리는 열차와 잘 어울린다.
‘코스모스역’이란 이름이 붙은 하동 북천역.
하동 북천면 코스모스 꽃밭에는 가을마다 코스모스를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가을꽃의 대명사는 코스모스다. 코스모스를 소재로 한 수많은 대중가요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가을의 문턱에서 우리는 문득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을노래들을 듣는다.
코스모스 중에 백미는 어느 한적한 시골 길가에 핀 꽃이다. 코스모스는 그 선명한 색깔과 이미지로 하여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코스모스는 목이 긴 꽃이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코스모스는 흔들린다. 흔들림과 선명한 색채, 우리는 그 코스모스를 마음에 투영하고 반추하고 가을을 맞는다.
다 아시다시피 코스모스의 원산지는 멕시코다. 꽃말은 순정이다. 코스모스는 거부감이 없는 꽃이다. 첫사랑 소녀 같은 꽃이고 그 소녀에게 보낸 편지 같은 꽃이다. 네 등짝에다 대고 탁 손바닥으로 두들겨 패 문양을 찍던 꽃, 압화다.
코스모스는 우주의 꽃이다.
나는 코스모스를 보고 있다
나는 중심
코스모스는 주변
바람이 오고 코스모스가
흔들린다 나는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고 있다
코스모스가 흔들린다고
생각할 때 중심이 흔들린다
욕조의 물이 빠지며 불어들 듯
중심은
나로부터 코스모스에게
서서히 넘어간다
나는 주변
코스모스는 중심
나는 코스모스를
코스모스는 나를
흔들리며 바라보고 있다
-문태준 ‘흔들리다’ 전문
코스모스는 기차와 잘 어울리는 꽃이다. 철길의 금속성과 코스모스의 식물성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잘 어울린다. 작고 가냘프고 쉽게 흔들리는 이 꽃은 커다란 쇳덩어리, 기차를 다독이고 어루만진다. 찬바람이 불고 마음이 흔들리고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우리는 플랫폼으로 나간다.
하동군 북천역은 코스모스역이다. 북천역은 하동과 진주의 딱 중간, 멀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동네가 북천이다. 그러니까 코스모스와 딱 맞다.
가을 북천엔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핀다. 손톱을 깎아 휙 뿌려놓아도 거기 코스모스가 피고 웃옷을 벗어 털털 검불을 털어도 거기 코스모스가 핀다. 밤이 되면 북천 노루들은 코스모스 꽃밭에서 연애를 한다. 나는 거기 첫사랑을 만나러 간다.
코스모스 꽃밭 위로 흰 구름들이 떠간다. 태풍이 지나간 가을하늘은 더욱 푸르고 맑다. 구름은 여전히 여행의 상징이고 은유고 동행이다. 정착하여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은 늘 구름처럼 떠돌고 싶어 한다. 부초처럼. 노마드처럼.
기차와 가을하늘과 구름과 코스모스….
진주역에서 기차를 타면 유수, 완사, 다음이 북천역이다. 일단 기분이 좋아진다. 똑같은 풍경이지만 자가용이나 버스를 타고 갈 때 보던 풍경이랑 가차를 탔을 때는 다르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보는 풍경은 일단 그 창문의 넓이, 프레임부터가 다르다. 훨씬 크고 넓다. 작고 고달픈 일상에 시달린 우리들의 안구는 그 크고 넓은 프레임을 통해 피로를 씻는다.
가을기차를 타면 자꾸 밖을 내다보게 되어 있다. 그동안 잘못한 거, 상처받은 거, 상처준 거, 그리고 이것은 꼭 좀 이렇게 고치고 싶은 거 등등, 창밖을 내다보며 우리는 많은 일상의 고민들을 떠올리고 씻는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김사인 ‘코스모스’ 전문
세상에 이렇게 작은 면(面)이 있을까. 북천엔 농협 포함 두 개의 마트가 있고, 기껏 대여섯 개의 식당이 있고, 다 찌그러져 가는 이발소와 미용실이 각각 한 개씩 있다. 다방도 없고 노래방도 없고 통닭집도 없다. 진짜로 촌동네다. 그 촌동네 끄트머리에 북천역이 있다.
처음 북천역에 내린 사람은 어리둥절 어디로 가야 할지 헷갈려 한다. 그런데 걱정할 거 없다. 북천에서는 코스모스의 손짓만 따라가면 된다. 양산을 쓴 여자들도, 카메라를 울러멘 아저씨도, 엄마 아빠를 따라나선 꼬마도 다 코스모스의 손짓을 따라 걸어간다.
석양이 지는 코스모스 밭, 소설가 공선옥은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다’고 했지만 나는 황혼녘의 코스모스 꽃밭에서 울고 싶어진다. 한바탕 울음을 쏟고 코를 휑 풀고 국수를 먹고 싶어진다. 어머니는 늙고 생활은 나아질 기미를 안 보이고 식구들은 뿔뿔이 제 고집대로 산다. 오늘도 차마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살고 있다.
(………)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중에서
아무 잘못도 없는 인생이여 도대체 왜 이런가?
글·사진=유홍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