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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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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42년째 양복 제작 외길 재단사 김규환 씨

“아버지 생전 못해드린 양복, 기부로 그 마음 대신하죠”
아버지께 반듯한 옷 해드리고 싶어 16살때 마산에 와 양복점서 일 시작
25살 때 기능사 1급 자격증 땄지만 그땐 이 세상에 아버지 안 계시고…

  • 기사입력 : 2012-12-11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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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규환 씨는 기성복에 밀려 맞춤양복이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양복을 만들어낸다는 자긍심으로 42년째 외길을 걷고 있다. 김 씨가 양복을 만들며 환하게 웃고 있다.
    김 씨가 양복을 바느질하고 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재단사가 능숙한 가위질로 천을 자른다. 1초에 한 땀 이상의 빠른 손놀림으로 바느질을 하는 멋진 솜씨에 반한 소년은 쓱쓱 잘려나가는 천을 보면서 나도 얼른 기술을 배워 아버지께 멋진 양복을 꼭 직접 만들어서 입혀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기술을 다 배우기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꿈을 잃은 소년, 아니 이제 60을 바라보는 재단사는 그 바람을 다문화가정이나 힘든 이웃에게 돌렸다.

    재단사 김규환(58·창원시 성산구 중앙동) 씨.

    16살에 고향 고성을 떠나 객지인 마산(현재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에서 옷 만드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통합창원시의 중심지인 성산구 중앙동에 반듯한 자신의 양복점을 운영하면서 42년째 한우물을 파고 있는 주인공을 지난 4일 만났다.

    “내가 만드는 옷은 혼과 정성이 담긴 예술품입니다. 10년을 입어도 변하지 않고 백 사람이 입으면 맞지 않지만 필요한 한 사람에게 맞는 옷이죠.”

    갓 다린 흰색 와이셔츠의 빳빳한 깃 같은 냄새가 난다. 재단사로서 애정과 철학, 옷을 만드는 사람의 혼이 담겨 있는 것 같아 참 듣기에 좋았다.

    그러나 시간을 조금만 되돌리면 오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어두운 그림자가 그에게 있다.

    먹고 입는 것이 귀하던 1971년. 16살의 나이로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A 양복점 사원으로 들어갔다.

    당시 쌀 한 말 값이 1000원쯤 했는데 한 달 월급을 1000원 받았단다. 한 사람이 겨우 한 달을 버틸 삯이다. 희망을 잃지 않고 밤을 낮 삼아 일하고 공부하면서 학업과 재단사의 꿈을 키웠다.

    “그땐 모든 것이 귀했죠. 시골에서는 결혼식이면 남의 양복을 빌려입고 가곤 했는데, 어린 나이에 양복이 너무 그럴싸하게 보였고 커서 빨리 기술을 배워 내 손으로 직접 만든 근사한 양복을 아버지께 꼭 입혀 드리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가 1980년 양복기능사 1급을 따고 제대로 된 옷을 만들 수 있었을 땐 이미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이제 그 꿈은 아버지 대신 낮은 곳의 사람으로 향했다.

    “지난해 창원시청에 근무하는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힘들게 사는 분께 옷을 만들어 줄 수 없냐는 제안이었죠. 복지센터인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그 일을 계기로 한 달에 한 벌 정도 익명으로 양복 기부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옷장에 걸린 옷을 가리키면서 “전문대 학생이 입을 옷이라면서 70만 원 상당인데 이 옷도 그런 취지”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창원시민 덕에 먹고 입고 자식 키우고 했으니 이제는 시민들에게, 고객에게 은혜를 나누고 돌려줘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바늘과 가위를 손에 놓지 않고 사는 인생. 지치지 않을까 싶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객이 오면 먼저 원단과 색을 고르고 치수를 재고 시침바느질을 하고 재봉을 시작하는데 통상 열흘이 걸린다”면서 “고급 양복을 맞추기 위해서는 시간·노력이라는 불편함이 있어도 이 정도의 기다림은 기본”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42년간 일했고 1970~80년대 호황기 땐 하루 10벌 정도 시침바느질을 했으니 옷을 지은 것은 5000벌이 넘을 것이고 재단·시침바느질한 것으로 치면 1만 벌은 되지 않겠느냐”고 되묻는다.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말 속에 관록이 묻어났다.

    설명이 이어졌다.

    윗옷 제작에 평균 25시간, 바지에 5시간 등 30시간이 투입되는데 손바느질만 10시간이 족히 걸린단다. 1초에 바느질 한 땀씩만 계산해도 1시간이면 3600땀이다. 말로 할 수 없는 품과 정성이 들어간다.

    옷장을 열어 보이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양복점에서 옷을 맞춘 고객들의 치수를 잰 종이를 보여준다. 색이 바랜 종이 사이로 오랜 시간과 그의 정성, 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한 번 치수를 잰 분들은 모두 기록으로 남아 있다면서 1500명이 넘을 것이라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이나 스승을 물었더니 “고인이 된 마산의 강신도 재단사를 가장 존경한다”고 미리 준비나 한 듯 답했다.

    1975년부터 1978년 초기에 3년을 배웠단다.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재단사로 재단사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으며 기능인으로서도 최고라고 꼽았다.

    그는 “기억에 남는 고객으로는 1990년 개업 초기, 보통 양복 한 벌이 35만 원 하던 시절인데 200만 원짜리 두 벌을 해 갔는데 며칠 되지 않아 옷이 구겨진다고 반품을 요구, 다시 두 벌을 해줬다”면서 “그 이후 최고 고객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옷이 구겨지는 것은 재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원단에 문제가 있다”고 웃었다.

    혹 재단사의 길을 걷겠다고 오는 젊은이는 없는가 궁금했다.

    “3년을 꼬박 배워야 하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한 달도 못 버틴다”면서 “딸만 둘인데 한 아이는 금융권에서 일하고 한 명은 유학 중인데 가업을 잇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큰돈은 벌지 못했지만 심부름하던 꼬마가 경영자까지 됐으니 이만하면 됐다”면서 “기술이 곧 나의 경쟁력이고 그것이 국가경쟁력으로 이어지는데 재단사도 내 세대가 마지막일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한숨을 쉬었다.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전수받을 사람이 없다는 아쉬움. 그의 끝말에서 바느질과 가위로 평생을 살아온 천직이 듬성듬성한 자신의 머리칼만큼이나 빠르게 자신을 밀어낸다는 자괴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을 밀고 나오는 기자에게 “내 양복점은 창원지역인 창원시 의창·성산구에서는 가장 오래된 수제양복점이지만 창원에서는 마산합포구 창동에 있는 B 양복점이 가장 오래됐을 것이라는 것을 꼭 써 달라”고 친절함과 겸손을 더했다.

    ※ 김규환 씨 약력 = 1955년 고성군 고성읍 죽계리 출생, 고성 율촌초교와 고성중, 창원공고 전신인 (마산)진일고등기술학교 졸업, 1975년 대한복장학원 수료 및 강신도 양복점 근무, 1980년 양복기능사 1급, 1981년 마산일번가양복점 근무, 1983년 대한복장기술협회 이사, 1990년 창원VIP양복점 재단사, 1991년 창원제일양복점 개업, 2007년 장인열전 출연.

    글= 이병문 기자 bmw@knnews.co.kr
    사진= 김승권 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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