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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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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난공불락- 최일걸

  • 기사입력 : 2013-01-02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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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쭉날쭉한 삶들을 한 두름에 엮어서 층층이 쌓아올린 것은 누구의 발상이었을까. 누적된 소음이 얼마이기에 살의를 숨긴 벽을 사이에 두고 안테나처럼 귀를 곧추세워 사방의 소리를 잡아당기는 걸까. 공명통이나 다름없는 각자의 집에서 의심으로 증폭된 인기척에 몸서리치는 주민들, 이웃 간의 대화는 얼마나 연체되었을까. 다들 지불 정지된 손을 갖고 있는 건 아닐까. 첨예한 대립의 집합체는 난공불락이어서 위층 남자 발소리가 들리자 즉각 전기드릴을 작동시키는 아래층 여자, 옆집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놀자 재빨리 인터폰을 집어 드는 이웃집 노인, 이렇게라도 조건반사를 형성해서 전 주민이 발레리나가 되어 백조의 호수를 펼쳐보자는 것이지. 공동주택에 살면서 억지스럽게 단독주택을 고집하는 저들이 간절히 희구하는 고요란 공동묘지에서나 가능한 것이어서 언제나 이웃은 부재중, 내 집 밖의 어떤 인기척도 용납할 수 없는데 마땅히 부재중인 이웃이 발소리를 내고, 울음을 터뜨리고, 변기 물을 내리니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기겁한 그들은 이웃의 부재를 확인하기 위해 또다시!



    또다시 위층에서 인기척이 떨어져 내리자 704호 여자는 으스스 몸서리쳤다. 잠시 후, 704호 여자는 모든 동작을 걸어 잠근 채 고도의 집중력으로 기척을 쫓는다. 다시 쿵 하는 소리가 704호 여인의 등판을 내리찍는다. 704호 여인은 거세게 고동치는 심장 박동을 진정시키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도대체 804호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내부공사라도 한단 말인가. 일 년 열두 달 쉼 없이 내부공사를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804호가 그녀의 의식에서 차츰 멀어지는가 싶더니 이상야릇한 신음소리가 704호 여자의 옆구리에 달라붙는다.



    그녀는 벌레가 아랫배를 기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털어내려 허리를 비튼다. 몇 달 전에 703호에 둥지를 튼 신혼부부는 밤낮없이 성교를 한다. 직장도 안 다니나.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지 않은가. 704호 여인은 옆집 소행이 괘씸하다. 결혼한 지 십년 만에 이혼하고, 3년 넘게 홀로 사는 그녀에게 성행위라는 건 까마득히 멀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간혹 아랫도리가 허전해지면서 울컥할 때가 있다. 몸은 다급하게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지만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단순한 성교라면 욕구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성행위에 따르는 복잡한 절차와 사랑이라는 잉여가치를 그녀는 수용할 수 없다. 703호 새색시가 내지르는 교성이 그녀의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요즘은 돈 주고 남자를 살 수 있다는데. 전 남편에게 아이 양육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위자료를 두둑이 받아낸 터라 그녀는 궁색하지 않다. 하지만 성매매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 같아 망설여진다. 704호 여자는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로 손을 가져간다. 바로 그 순간, 진동음이 그녀의 발바닥을 찌른다.



    그녀는 급속냉각된 것처럼 단숨에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숨조차 내쉬지 못한다. 한참 후에야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거실 바닥을 내려다본다. 아래층에 사는 604호 할머니가 전기드릴로 그녀를 공격한 것이다. 여든이 넘었으니 귀가 어두워질 때도 되었는데 604호 할머니는 유독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있지도 않은 소리를 확대 재생산하여 그녀에게 떠넘긴다. 그녀는 언제나 이웃을 의식하며 최대한 행동을 절제한다. 그녀만큼 조용히 생활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도 그 노파는 모든 소음을 위층에 사는 그녀에게 전가한다. 604호 할머니는 조금만 기척이 들렸다 싶으면 드릴로 704호를 공격한다. 그 덕분에 그녀는 실험실의 흰쥐처럼 조건반사를 형성하게 되었다. 604호의 전기드릴이 그녀를 겨냥하면 그녀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려 발악한다. 아래층 노파가 생의 어떤 기척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일단 드릴이 작동되면 숨 쉬는 것조차도 버겁다. 드릴의 진동음이 뼈마디 마디를 파고들면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게 그저 민망하고 죄스러울 따름이다. 어떻게 해서든 604호 노파에게 자신의 부재를 확실하게 밝히고 싶다.



    704호 그녀는 까치발로 걸음을 옮긴다. 어떤 기척도 내지르지 않는 705호가 수상하다. 705호에 사는 아가씨는 간혹 외마디 비명으로 자신의 존재를 밝혔다. 지난 일요일에 705호 아가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흐느껴 울면서 간헐적으로 절규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 705호는 정적 속에 잠겨 있다. 집을 비우고 여행이라도 떠난 걸까? 그렇다면 안심인데, 704호는 705호 아가씨가 자살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증거는 없지만 그녀는 705호 아가씨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벽 이쪽에서 벽 저쪽의 동정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705호 아가씨가 불쑥불쑥 내지르는 소리는 막바지에 몰린 듯 다급했다. 704호는 시체 썩는 악취가 진동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804호에서 굉음이 벼락처럼 704호를 내리친다. 704호 그녀는 귀를 틀어막은 채 비트적거렸다. 굉음으로 먹먹한 고막에 703호 새댁의 교성이 점액질로 덧발라진다. 604호 할머니도 가세한다. 전기드릴로 704호 그녀를 쿡쿡 찌르며 살아있니, 죽었니? 하고 묻는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죄악임을 뼛속 깊이 절감하는 순간이다. 705호 아가씨의 침묵 역시 엄청난 중압감으로 704호 그녀를 짓누른다. 그녀는 상하좌우의 벽이 그 간격을 좁혀 바짝 욱죄어 오는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압사 직전의 공포에 몸부림치다가 베란다로 내몰린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들킨 것 같아 억지스럽게 자기 자신을 외면하려 하지만 제 몸이 베란다 창을 열고 허공을 도발하려는 것을 방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저 아래 시멘트바닥이 어지럽게 맴을 그리며 그녀를 빨아들이려 한다. 그녀는 창밖으로 기우는 상반신을 간신히 베란다 안으로 불러들인다. 베란다 창을 거칠게 닫고 잠가버리지만 창밖의 허공은 지나치게 유혹적이다. 그때였다. 경악으로 확대된 그녀의 동공에 한줄기 빛이 걸린다. 그녀는 헉, 하고 신음을 깨문다. 그 남자다. 그 남자가 그녀를 엿보고 있다.



    704호 그녀는 곤두박질칠 것 같은 자신을 추스르며 거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가 카메라 망원렌즈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있기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풀어놓는다. 자, 어서 찍어요. 찰칵!



    맞은편 아파트에서 정체 모를 시선이 자신의 삶을 염탐하고 있다는 걸 맨 처음 알았을 때, 그녀는 수치심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었다. 그때 그녀는 샤워를 끝내고 욕실에서 나왔다.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알몸이 타인에게 노출되었으니 수치심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혼자 사는 여자라고 주변에서 자신을 곱지 않는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터라 그녀는 울분에 사로잡혔다. 경찰에 신고할까도 생각했고, 득달같이 맞은편 아파트로 달려가 음탕한 사내를 혼내주려고도 했었다. 카메라로 채집당한 자신의 알몸으로 인해 전전긍긍하기도 했었다. 그녀는 일주일 넘게 커튼을 방패삼았다.



    그런데 보름이 지나지 않아 그녀는 무방비로 노출되어버렸다. 그만큼 주변의 관심이 간절했던 것이다. 설령 그것이 흑심을 품은 시선이라 해도 그녀는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갈망했다. 그녀 곁엔 아무도 없었다. 전 남편은 일점혈육인 아들과의 소통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아들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어 수십 차례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아들은 엄마가 보낸 메일을 열어보지도 않았다.



    정체 모를 시선은 집요하게 그녀를 관찰하고 채집했다. 그 집요함이 병적인 것이라 해도 그녀는 거리낌 없이 자신을 노출시켰다.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이 그저 기뻤고 고맙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카메라렌즈 속에 가감 없이 자신을 담으려 노력했다. 아무것도 감추고 싶지 않았다. 온전하게 혹은 적나라하게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의 치부를 서슴없이 보여줬을 때 그녀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격한 욕정에 사로잡혀 사내의 카메라렌즈를 향해 가랑이를 벌리고는 자위행위를 했다. 처음으로 맛본 절정의 순간이었다.



    전 남편은 거칠고도 도발적인 남자였다. 전 남편의 야수성의 기저에 있는 지배욕이 그녀는 역겨웠다. 전 남편이 섹스를 통해 얻으려 했던 것은 정복이었고, 그녀의 몸뚱이는 노획물이었고 전리품이었다. 전 남편은 갈수록 공격적이었고 가학적인 쾌감을 얻으려 했다. 사디스트로 돌변한 전 남편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그녀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전 남편은 마땅히 복종해야 할 여자의 반란을 용서하지 않았다. 잔혹한 폭력으로 그녀를 응징했다. 그녀는 살기 위해서 이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집요한 시선과 그녀의 관계가 관음증과 노출증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일부러 자신의 모든 생활을 거실에서 해결했다. 밥 먹는 것부터 잠자는 것까지 사내의 시야에 노출시키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고, 재채기를 하고, 트림을 하고, 무좀이 심한 발바닥을 긁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눈곱을 떼어내고,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춤을 추거나 엉망이 되어 흐느껴 울기도 했다. 갈 데까지 구겨진 얼굴로 사내를 향해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사내 앞에선 감출 게 없었고,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집요한 응시가 그녀에게서 가식과 허영을 벗겨낸 것이다.



    인터폰이 울린다.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예기치 않은 사태에 직면한 것처럼 허둥댄다. 인터폰 저쪽의 604호 노파는 마귀할멈처럼 704호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는다. 그녀는 그저 죄스러워 미안하다는 말을 늘어놓는다. 처음엔 604호 노파의 비난에 대항했었다. 말도 안 되는 트집에 맞서 논리정연하게 대처했었다. 자신의 침묵이 얼마나 단호한 것인지 밝히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젠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604호 노파의 본심을 아는 터라 그녀는 궁색하다. 604호 노파는 층간 소음 때문에 그녀를 몰아세우는 게 아니라 자신의 머리 위에 이혼녀가 산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604호 노파에게 이혼녀는 정숙하지 못하고 흠집이 많은 여자를 의미했다.



    도대체 804호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여러 사람이 사는 것은 분명한데 가족은 아닌 것 같다. 804호는 합숙소 같은 분위기다. 어쩌면 영화에서 본 조폭들의 아지트가 그녀 머리 위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804호에선 폭력이 끊임없이 자행되었고, 살의의 조짐이 농후했다. 다시 705호 아가씨가 궁금해진다. 부패한 시신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녀는 섬뜩해서 고개를 홰홰 젓는다. 아닐 것이다. 어디 멀리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의혹을 떨쳐낼 수 없다. 만약 맞은편 남자라면 703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엔 그 남자가 궁금해진다. 맞은편 아파트의 그에겐 얼굴도 없었고 팔다리도 없었다. 그 남자는 오직 하나의 시선으로 그녀의 일상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담아두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권태와 고독과 허무를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를 알고 싶다. 그의 눈 코 입을 만져보고 싶다. 그와 밤을 하얗게 밝히며 대화를 하고 싶다. 그가 원한다면 모든 것을 허락할 것이다. 그렇지만 두렵다. 만약 그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그를 신비주의로 감싸는 것으론 부족하여 몇 겹의 환상의 막으로 포장하고 있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그녀는 804호 만행을 용서할 수 없었다. 704호 그녀는 인터폰으로 경비실에 연락했다. 그녀는 경악했다. 804호가 빈집이라니. 경비원의 말에 따르면 804호 집주인은 일 년 전에 해외에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집주인의 부탁으로 경비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804호의 이상 유무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804호에서 명확히 존재를 밝히는 저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녀는 허깨비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한기가 등골을 타고 번졌다. 그녀는 으슬으슬 몸을 떨었다. 살갗에 돋은 소름이 까칠했다. 604호 노파가 그녀를 극한으로 몰고 갔다. 전기드릴의 진동음에 그녀는 갈가리 찢어발겨지는 것만 같았다. 804호에만 허깨비가 살까. 704호 그녀가 804호에서 자행되는 소음 공세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처럼 604호 노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허깨비는 704호에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새삼 다른 눈으로 자신의 영역을 둘러봤다.



    703호 신혼부부는 오늘도 상호 존중의 거리를 허물고 뒤엉켜서 교접하고 있다. 생식기로 서로의 경계선 안쪽에 틈입하려는 신혼부부의 몸부림은 가련한 허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여자의 교성이 704호 여인의 음부에 축축하게 젖어든다. 그녀의 뇌리 속에서 알몸의 남녀가 여러 가지 체위를 선보인다. 그녀는 다양한 채널로 자신을 돌리려 하지만 리모컨마저도 도발적인 상징물이 되어 그녀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한다. 다급해진 그녀는 베란다를 향해 시선을 던진다. 맞은편 아파트의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시선에 걸리지 않는 그녀는 시무룩하고 후줄근하다. 그녀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의 눈길이 간절하다. 그의 눈길이 잡아당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의 눈길이 팽팽하게 잡아당겼을 때 그녀는 비로소 재생된다. 난데없이 아래층 노파가 축 늘어진 그녀를 잡아당긴다. 전기드릴이 드르륵 진동음을 토하자 그녀는 움찔거린다. 전기드릴의 진동을 빌려 되살아난 그녀는 불판 위의 오징어처럼 꿈틀거린다. 그녀는 한껏 부풀어 오른다. 맞은편 그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터뜨려줬으면 좋겠다.



    705호의 부재가 704호 그녀의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704호 그녀는 이것이 바로 시체 썩는 냄새라고 확신했다. 그렇다. 705호에선 부패의 전 과정이 적나라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베란다에서 밀려드는 눈부신 햇살이 구더기처럼 꿈틀거리며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704호는 대번에 구더기 떼로 창궐하지만 그녀는 진공포장된 것처럼 안심이다. 그녀는 705호를 향해 자신을 열어둔 채 침묵의 아우성을 듣는다. 한껏 날이 선 침묵이 찰랑하게 그녀의 귓바퀴에 휘감긴다. 침묵만큼 위협적인 소음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래층 할머니는 그녀의 침묵을 엿듣고 저 난리를 피우는 건지도 몰라. 그녀는 눈길로 천장을 더듬어 오른다. 일 년 넘게 비어 있다는 804호 역시 포화상태에 이른 침묵이 빅뱅을 감행한 것이지. 703호 신혼부부의 몸부림이 그녀의 아랫배에 땀샘을 자극한다. 진땀나는 순간에 그녀는 자신의 좌우에서 자행되는 부패와 생식의 전 과정, 극과 극을 이루는 구더기와 정액이 상호 대립적이면서 다분히 동질적이어서 시니컬하게 웃고 만다.



    위층의 부재가 엄청난 하중으로 그녀의 머리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위층의 정적이 그녀에겐 곤혹스럽고 어색하다. 차라리 804호가 쿵쾅거리고 들썩거렸으면 좋겠다. 804호가 잠잠할수록 703호의 성행위는 704호 그녀에게 밀착된다. 705호의 주검은 어떻게 처리해야지. 그녀를 작동시키던 아래층 노파의 전기드릴마저 감감무소식이다. 게다가 맞은편 아파트는 무덤처럼 잠잠하다. 이거야말로 위기의 순간이다. 그녀는 다급하게 모든 오프라인을 차단한 채 컴퓨터를 켠다.




    그녀는 온라인에 자신을 연결하고 이메일을 클릭한다. 아들에게서 메일이 왔다. 단숨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거세게 고동친다. 그녀는 가쁜 숨을 고르며 마우스로 아들이 보낸 메일을 클릭한다. 아들이 보낸 메일은 너무 짧았고, 그만큼 가혹했다. 또 한 번 메일을 보내면 그녀를 수신거부로 설정하겠단다. 그녀는 잠시 막막하게 앉아 있다가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인터폰 수화기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604호 노파에게 고해성사를 늘어놓았다. 소리의 진원지는 704호이며 자신은 불순한 의도를 갖고 604호에 융단포격을 감행했다고 실토했다. 604호 노파는 그녀에게 비난과 악담을 퍼부었다. 노파의 폭언에 그녀는 마조히스트처럼 쾌감을 느꼈다. 아래층 노파가 전기드릴로 좀 더 가혹하게 자신을 다뤄줬으면 싶었다. 인터폰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604호 노파가 그녀의 천적이 아니라는 것을, 604호 노파와 자신은 일종의 공생관계라는 것을, 604호 노파의 버거운 삶을 지탱하는 것은 생의 기척을 찾으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노파는 감당하지 못할 자괴감을 그녀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생존게임이다. 이것마저 놓아버린다면 604호에도 구더기가 창궐할 것이다. 604호 노파가 보복행위를 감행한다. 704호 그녀는 전기드릴의 진동음에 자신을 내맡긴 채 스파크를 일으킨 것처럼 요동친다. 804호에서 발소리가 쿵쿵, 거리는가 싶더니 왁자지껄해졌다. 마치 강력한 생명력이 약동하는 것 같다. 703호 신혼부부도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저들도 살아 보겠다고 악착같이 발악하는 거다. 705호 구더기들도 필사적으로 꿈틀거릴 것이다.



    관심만으론 부족한 걸까. 때론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남자가 못 견디게 그립다. 그 간절함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다. 그럼에도 그녀가 꼼짝없이 704호에 붙들려 있는 것은 결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그녀와 남자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거리로 따지면 남자의 아파트까지는 걸어서 십 분이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남자와 그녀 사이의 거리는 몇 억 광년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녀에게 남자는 일종의 허블망원경이었다. 허블망원경의 도발적 형태는 남근신앙을 토대로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비유로도 그녀는 그 남자에게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 남자는 단지 천체망원경으로 704호라는 소혹성을 관측할 따름이다. 그가 우주 탐사선을 띄울 수도 있는 문제다. 하지만 과연 그녀의 궤도 진입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언제부터 인간 상호 간에 경계선이 명확해진 것일까?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인간 상호 간에 경계선은 보다 정밀해지고 엄격해졌을 것이다. 전자파 차단막처럼, 아니 사건의 지평선처럼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경계선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별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그 별에 도달할 수 없다. 704호란 소혹성에서 그녀는 외부와 교신을 시도해 본다.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외부에 알리고 싶다. 705호 아가씨가 역한 냄새로 자신의 주검을 자명하게 밝히는 것처럼.



    악취가 진동했다. 늘 청각에 의지해왔던 704호 그녀는 후각을 자극하는 악취로 인해 귀까지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705호 아가씨가 살포하는 죽음의 냄새는 경악할 만큼 강력한 것이다. 왜 다들 가만 있는 거지. 무차별적으로 살포되는 부패를 다른 사람들은 감지하지 못했단 말인가. 악취 때문에 그녀는 식사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무엇을 삼킬라치면 구역질이 치밀어 왔다. 코를 후비는 죽음의 징후로 인해 그녀는 콧구멍이 얼얼했다. 그녀는 맞은편 아파트의 시선을 향해 무언극을 펼쳐 보였다. 맞은편 아파트의 그가 경찰이나 119에 신고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녀는 변기를 찾는 횟수가 잦아졌다. 변기에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헛구역질로 고해성사를 늘어놓았다. 아들을 임신했을 때보다 더 심한 입덧이었다. 죽음이 아닌지도 모른다. 상상임신일까?



    증상은 임신이 분명했지만 임신 가능성이 없었으므로 상상임신이 틀림없었다. 아들에 대한 애착이 박탈감으로 바뀌면서 보상심리에서 비롯된 상상임신일 것이다. 시체 썩는 냄새가 그녀의 상상임신을 촉발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자궁은 부패의 온상일까? 어쨌든 그녀의 상상력은 임신으로 증폭되었다. 아랫배가 부풀어 올랐고 생리가 멈췄다. 여성호르몬 분비가 활성화되었고 유방에 젖이 돌기 시작했다. 임신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엄숙하게 샤워를 한 다음 알몸으로 거실에 나왔다. 맞은편 아파트 어둠 속에 사내의 눈길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부른 배를 살며시 보여주었다. 맞은편 아파트 어둠 속에서 불빛이 터졌다 이내 잦아들었다.

    “당신이 이 아기 아빠예요.”

    그녀는 어둠 저편의 눈길을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완벽한 상상력의 산물이죠. 우리 사랑이 그렇듯.”

    그녀는 간절하면서도 막막한 눈망울로 어둠 저편을 바라다봤다. 그녀는 자신이 우주 공간에 미아로 떠도는 기분이었다.



    이제 악취는 외부의 문제가 아니었다. 악취는 그녀의 내부에 있었다. 그녀의 날숨과 들숨 사이에 악취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태몽을 풀어놓듯, 태교를 하듯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705호예요.”

    현관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704호는 아찔했다. 죽어 마땅한 여자가 문 밖에 서 있는 것이다.

    “문 좀 열어주세요.”

    썩어문드러진 여자 목소리치곤 너무나 생생했다. 704호 그녀는 잠시 쭈뼛하니 서 있다가 허둥지둥 잠금장치를 풀었다. 현관문을 여는 그녀의 손이 경련을 일으켰다. 현관문이 열리자 705호 아가씨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어쩌다 몇 번 705호 아가씨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704호는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을 끌어안은 것 같은 705호를 보며 혀를 끌끌 찼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705호 아가씨는 생기발랄했다.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이다. 704호 그녀는 휘둥그런 눈으로 705호 아가씨를 훑어봤다.

    “저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704호 그녀는 705호 아가씨의 시선이 자꾸 베란다 창으로 향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봤다. 705호는 그동안 자신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러 이웃에 폐를 끼친 것을 사과하러 왔다고 했지만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것 같았다.

    “근래 조용해서 어디 멀리 여행간 줄 알았어요.”

    704호가 말을 하자 705호는 미소를 내비쳤다.

    “요즘은 살 만했거든요. 살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생겼고요.”

    705호의 삶은 확고해 보였다. 과도하게 확고해 보여서 704호는 불안했다. 705호는 노골적으로 시선을 베란다 창으로 돌렸다. 705호의 시선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알게 된 704호는 질겁했다. 704호 그녀의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여기서 더 잘 보이네요.”

    704호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제가 사랑하는 남자가 맞은편 아파트에 살거든요.”

    705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틀림없이 그 남자의 집이었다.

    “아 그래요. ”

    704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할 일이네요. 뭐하는 남자예요? 언제부터 교제했죠?”

    705호는 대꾸하지 않고 맑은 웃음을 게워냈다.

    “나 임신했어요.”

    704호는 처절하게 말했다.

    “봐요.”

    704호는 부풀어 오른 복부를 705호에게 과시했다.



    704호 그녀는 705호 아가씨의 상상이 아직 임신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곤 안도했다. 그렇지만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남자의 시선이 촉발시킨 사랑이 704호뿐만 아니라 705호로 확장되었다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704호는 705호의 사랑이 성공적인 오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맞은편 눈길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고 믿었다. 한눈팔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100% 확신할 순 없었다. 만약에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남자의 관심이 704호가 아닌 705호라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즉각 전기드릴이 그녀를 겨냥했다. 704호 그녀는 전기드릴이 제 몸을 뚫고 들어왔으면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래층 노파는 마지막 안간힘으로 드릴을 작동시키고 있을 것이다. 위층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증폭되었다. 부재는 저렇듯 자명하다. 그런데 존재한다는 것은 왜 이렇게 흐릿하고 애매모호한 것일까. 그녀는 한껏 부풀어 오르는 배에서 태동을 느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배로 가져갔다. 과연 태동이 의미하는 것은 무얼까?



    택배가 도착했다. 며칠 전에 인터넷으로 주문한 러시아제 군용 망원경이 도착한 것이다. 그녀는 포장지를 뜯지 않고 한참이나 딴전을 피웠다.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맞은편 아파트의 그는 시선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맞은편 아파트의 사내에게 얼굴과 팔다리를 달아준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맞은편 아파트 사내의 실체에 직면했을 때 충격을 견딜 수 있을까. 이번 선택으로 그녀는 처참하게 허물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오랜 갈등 끝에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다가 안방으로 몸을 숨겼다. 그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상자 안에서 망원경을 꺼냈다. 금단의 열매에 손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쫓겨날 에덴동산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가 닿는 곳이 704호인지 705호인지 밝혀내야 했다. 만약 그가 주목하는 게 705호라면 그녀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죽느냐, 죽이느냐.



    그녀는 어둠에 잠긴 베란다에서 망원경을 든 채 도사리고 있었다. 맞은편 아파트의 그는 704가 어둠에 잠겨 있는 걸 보고 의구심을 품을 것이다. 그녀는 잠을 잘 때도 불을 끄지 않았다. 그에게 모든 걸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소등이 그에게 공연한 의심과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다행히 맞은편 아파트는 잠잠하다. 불이 켜져 있는 걸로 보아 그는 집에 있는 것 같은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차례 숨을 고르고 나서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망원경을 들어 눈으로 가져갔다.



    두 눈에 망원경 렌즈를 갖다 댄 다음 그녀는 초점을 맞췄다. 그의 아파트 거실이 코앞에 있는 것처럼 또렷하게 보였다. 맨 먼저 망원경 속으로 들어온 것은 704호 그녀였다. 그녀는 기겁하여 신음을 깨물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벽면에 걸린 그녀의 대형 사진이었다. 그의 아파트 거실 벽면은 그녀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거실 바닥에 널려 있는 것도 그녀 사진인 것 같았다. 그녀는 나직하게 탄성을 질렀다. 그가 주목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혀진 순간이었다. 그녀는 망원경 속으로 불쑥 뛰어든 실루엣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망원경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망원경 초점을 조정하여 실루엣을 확 잡아당겼다. 마침내 그가 선명하게 망원경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시니컬하게 웃다가 울음을 깨물었다.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 맞은편 아파트의 그녀는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를 들곤 베란다로 나왔다. 704호 그녀는 밑바닥 없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넋 나간 듯 멈춰 있거나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704호를 떠돌았다. 그녀가 맞은편 아파트의 눈길을 남자의 것으로 단정 지은 것은 허무맹랑한 상상이었다. 맞은편 아파트 그녀의 눈길 앞에서 펼쳤던 자신의 행동이 수치스럽고 역겨워서 704호 그녀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는 삶에 미련을 갖고 싶지 않아요.”

    또다시 그녀 앞에 불쑥 나타난 705호 아가씨는 공허한 목소리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705호 아가씨는 견디지 못하고 맞은편 아파트로 찾아간 것이다.

    “그 여잔 동성연애자예요. 한눈에 봐도 알겠더라고요.”

    705호 아가씨의 목소리엔 경멸이 배어 있었다.

    “그 여잔 아줌마를 사랑하는 모양이더군요.”

    705호 아가씨의 시선은 탄알이 장전된 것처럼 704호 그녀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705호 아가씨의 절규가 벽을 뚫고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위층의 쿵쾅거림은 기세등등하다. 부재는 저렇듯 간단명료하다. 아래층의 전기드릴은 어김없이 704호 그녀의 부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703호 남녀의 성교는 종말의 날을 알리는 나팔소리 같았다. 704호 그녀는 자신을 살아 숨 쉬게 했던 눈길이 간절했다. 맞은편 아파트의 그녀 역시 704호 그녀가 간절한 모양이었다. 맞은편 아파트의 그녀는 수시로 베란다에 나와 704호를 향해 눈길을 던지거나 천체를 관측하듯 카메라로 704호를 관찰했다.



    704호 그녀가 맞은편 아파트의 그녀에 대한 봉쇄 조치를 해제한 것은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맞은편 아파트의 눈길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화사한 옷차림으로 거실에 나와 환한 미소를 맞은편 아파트 그녀에게 보였다. 704호 여인에게 동성애 기질이 내재되어 있었던 걸까. 남녀 간의 사랑이 한계점에 도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대상을 여자로 바꾼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히 존재에 대한 갈망이었다.



    이제 704호 그녀가 망원경으로 맞은편 아파트의 그녀를 끌어당겼다. 맞은편 아파트의 그녀는 20대 후반으로 보였다. 도발적인 미모의 소유자였지만, 타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차가움이 차단막처럼 그녀의 얼굴에 깔려 있었다. 704호의 눈길이 자신에 가 닿는 것을 눈치챈 맞은편 아파트 그녀는 스스럼없이 자신을 풀어놓았다. 그것은 일종의 팬터마임이었고 행위예술이었다. 704호는 맞은편 아파트 그녀의 몸짓과 표정에서 그녀의 우여곡절을 읽을 수 있었다. 맞은편 아파트 그녀의 무언극을 지켜보며 704호 그녀는 많이 울었고 많이 웃었다.



    쌍방향으로 펼쳐지는 무언극엔 언어가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언어는 얼마나 저속하고 얄팍한 속임수인가. 맞은편 그녀와 704호 그녀는 오직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녀들의 몸짓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일종의 묵계 같은 것이어서 어느 쪽도 침범을 감행하지 않았다. 두 여인은 막막한 우주에 떠도는 소혹성이나 다름없었지만 상대방이 내지르는 빛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밝혔다. 둘 사이엔 심연이 가로놓여 있었지만, 두 여인은 상대방의 숨결과 떨림과 빛깔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여인은 궁극에 이르렀다. 깊은 밤, 704호 그녀는 망원경을 통해 맞은편 아파트 그녀가 펼쳐 보이는 무언극을 보고 있었다. 맞은편 그녀는 변태를 시도하는 곤충처럼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고 있었다. 조명 속에 드러난 맞은편 그녀의 나신은 흉터가 수십 마리 독사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맞은편 그녀의 왼쪽 젖가슴에는 인식표 같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맞은편 그녀는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통해 어떤 남자가 자행한 폭력을 고발하고 있었다. 704호 그녀는 망원경 속에 저를 몰아넣은 채 울음을 깨물었다. 남편의 잔혹한 학대가 그녀의 살갗을 뚫고 툭툭 불거지는 것 같았다.



    맞은편 그녀는 알몸으로 희비쌍곡선을 그려 보이더니 의자 위에 올라섰다. 703호 남녀는 조급하게 서로를 갈구하고 있었다. 아래층 노파가 전기드릴을 작동시켰다. 705호 아가씨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올가미가 맞은편 그녀를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맞은편 그녀는 손짓으로 작별을 고했다. 위층의 소란은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704호는 휘청거리며 어금니로 신음을 깨물었다. 맞은편 그녀는 제 목을 올가미에 넣고는 바짝 조였다. 703호 남자의 거친 호흡과 여자의 교성이 강렬하게 뒤엉켰다. 맞은편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른거렸다. 705호 아가씨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맞은편 그녀는 발로 의자를 걷어찼다. 704호 그녀는 허공을 밟은 듯 막막했다. 전기드릴의 진동음이 704호 그녀의 뼈마디에 저미어 들었다. 올가미에 대롱대롱 매달린 맞은편 그녀의 알몸이 눈부신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렇게 고독한 별은 최후를 맞이했다. 703호 남녀는 알몸으로 뒤엉킨 채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망원경이 밤하늘에 밑줄을 그었다. 전기드릴이 작동을 멈췄다. 704호 그녀는 극심한 산통을 느끼곤 거실 바닥에 누웠다. 그녀는 급히 팬티를 벗고는 가랑이를 벌렸다. 죽을힘을 아랫배에 몰아놓았다. 극한으로 몰린 그녀의 상상력이 생명을 탄생시키려는 순간이었다. 위층 소음이 무자비하게 침략을 감행했지만 704호는 난공불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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