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5월 06일 (월)
전체메뉴

경남의 마을 아, 본향! (14) 창원 동읍 다호리고분군마을

역사와 유물이 잠자는 ‘한국판 마야 문명지’

  • 기사입력 : 2013-04-23 01:00:00
  •   
  • 다호리고분군 유물 발굴지.
    철기시대 유물이 대량 발굴된 다호리고분군마을.
    마을 유물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는 초등생들.
    마을의 재물이 밖으로 새는 것을 막는 보호수.
    주말농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체험객들.
    야생화 손수건 탁본뜨기를 하고 있는 초등생들.



    기원전 변한 중심지로 무덤 70여기 확인

    철검·농구·부채자루·악기 등 대량 출토

     
    유적 탐방·주말농장 등 체험마을로 인기

    9월 문자문명전 연계 고분군축제 계획도


    창원 동읍에 가면 거대한 역사의 숨결이 숨겨진 마을이 있다. 마을 입구에는 나무로 만든 장승이 손님을 맞이한다. 골목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사방으로 탁 트인 광경이 나타난다. 이곳은 40여 가구 100여 명이 살고 있는 다호리고분군마을이다. 겉으로는 논과 밭 그리고 단감 과수원이 대부분인 조용한 농촌마을이다. 하지만 이 마을 땅속에는 거대한 역사가 묻혀 있다. ‘한국판 마야 문명지’나 다름없다. 마을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구릉, 산, 논 등 땅을 파헤치는 곳마다 유물이 나온다고 한다. 특히 이 일대는 청동기 시대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돼 기원전 1세기부터 ‘철의 왕국’ 변한의 중심지로 중국과 무역이 활발했던 곳이다. 또 가야국 시대에는 김해에 장군차를 전파한 허황후가 이곳에 죽로차를 보급, 시배지로 옛 문헌에 기록돼 있다. 또 생태계의 보고이며 철새도래지인 주남저수지가 있다. 마을 서쪽에는 구룡산이, 남쪽에는 정병산이 위치해 배산임수 지형이다.


    ◆마을의 역사

    30년 전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인근 야산과 구릉지역 여기저기서 도깨비불 같은 게 발견됐다. 마을사람들은 불빛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도굴꾼들이 작업을 하기 위해 밝힌 전등불이었다. 한 주민은 “어릴 적에 도굴꾼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훔친 유물량도 박물관에 보관된 것보다 더 많을 것”이라며 “당시 경찰에 신고했으나 도굴 사건이 너무 많아 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마을 인근 야산이나 구릉지역에서 토기 파편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선조들이 지금처럼 마을에서 살지 않고 물을 구하기 쉬운 구릉이나 산에서 거주했기 때문이다.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300여 년 전 연안김씨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다. 그 뒤를 이어 의성김씨도 터를 잡았다. 두 집안이 항상 같은 비율로 살았고, 지금도 10가구씩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다호리고분군에서 붓이 발견된 내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예가, 교수, 시인 등 학문과 관련된 인사가 많이 나왔다. 최근에는 박사 두 명이 배출됐다. 연안김씨 종손인 서예가 다천 김종원 씨의 자택과 작업실이 이곳에 있다. 그의 집 뒤편에 연안김씨 재실이 푸른 대밭을 배경으로 서있다.

    다천 선생은 지난 2009년부터 매년 문자문명전을 개최하면서 다호리에서 발견된 붓을 화두로 문자의 현재적 의미와 미래를 전망하는 전시를 하고 있으며, 현재 마을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김주관 다호리고분군마을 이장으로부터 사라진 마을 역사도 들을 수 있었다.

    마을 어귀에 울창한 보호수 10여 그루가 있었다. 보호수는 마을의 재물이 밖으로 새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심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15년 전 마을에 길이 나고 새집이 들어서면서 조금씩 없어졌고, 현재 1그루가 남아 외로이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수호하고 있다.

    또 고속도로 휴게소 역할을 했던 오마등이 있었다. 오마등은 다섯 마리 말을 묶어둘 수 있는 여각으로, 한양으로 가던 중 들러 막걸리 한 사발 하고 쉬었다 가는 곳이었다. 오마등 인근에는 주막, 정미소, 대장간, 이발소, 주막 등도 있었다. 주막은 20여 년 전 길이 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마을 주변 지형에 대한 별칭도 재미있다. 여우가 많이 나왔다는 ‘야시밭골’, 폭포수가 있어 칠월 칠석 마을사람들이 목욕을 했다는 ‘복복시’, 불당이 있었던 자리여서 ‘불당골’ 등이다.

    김 이장은 “농촌체험마을을 운영하면서 학생들에게 우리 마을의 우수성을 설명할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며 “오는 9월 문자문명전과 연계해 ‘2000년 역사의 다호리고분군축제’를 계획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원진 1세기 철기문명의 중심지

    지난 1988년 9월 다호리 고분군 일대가 사적 제327호로 지정됐다. 도굴꾼이 지금 1호분 무덤에 엄청난 유물이 묻힌 것을 감지하고 당국에 신고, 국립 중앙박물관팀이 현장에 달려와 확인하고 바로 사적 지정 신청을 했다. 발굴은 1992년까지 7차에 걸쳐 이뤄졌다. 고분군은 다호리마을 구릉과 주남저수지로 이어지는 저습한 평지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토광목관묘와 옹관묘 등 70여 기의 무덤이 확인됐으며,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로 추정됐다. 1호분에서 철검, 철도끼, 낫 등 무기류와 일반 농공구류까지 다양한 철기류가 발견돼 현지에서 제작된 것은 물론 상용화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 철기 제작기술이 중국 못지않게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1호분은 철기류 외에 붓과 칠이 된 한국식 동검, 부채자루, 현악기를 비롯해 동경, 오수전 등 중국 한나라 계통의 유물도 출토돼 활발한 무역상도 보여주고 있다. 붓에 대해 그 당시 이미 한자를 쓰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는 주장이 대세지만 옻칠하는 데 사용됐을 것이라고 주장도 있다.

    지난 19일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유적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주말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밭에서는 고추를 심기 위한 준비작업이 한창이었고, 할머니들은 논두렁 밭두렁에서 봄나물을 캐고 있었다. 고분군이 발굴조사 후 다시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유물이 발견됐다는 것은 마을에 마련된 전시관을 통해 알 수 있다. 전시관에는 진품이 아닌 모조품으로 쇠도끼, 청동거울, 청동칼, 칼집, 붓, 부채, 손칼, 굽다리 접시, 잔, 두형토기, 껴묻거리 대나무 바구니 등이 진열돼 있다.


    ◆농촌마을 체험프로그램

    지난 19일 다호리고분군마을에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부산 세산초등학교 학생 등 40여 명이 도농교류 체험활동을 하러 왔다. 초등생들은 탁본 뜨기, 쑥캐기, 농촌 생활 모습 견학, 떡메치기 등 다양한 체험활동을 했다. 특히 야생화를 하얀 천에 놓고 하는 탁본 뜨기가 아이들에게 최고 인기를 끌었다. 박길숙 교사는 “유적 탐방뿐만 아니라 농촌체험도 할 수 있어 이곳을 선택했다”며 “아이들에게 즐거움도 줄 수 있고, 배움의 장도 돼 유익한 공간이다”고 말했다.

    다호리고분군마을은 이 같은 역사성을 살려 유적지 및 주남저수지 탐방, 당나귀수레타기, 조릿대터널 탐험 등의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봄에는 감자, 여름에는 옥수수, 가을에는 단감·고구마를 수확하고, 겨울에는 된장을 담그고 새끼를 꼬는 등 계절별로 특화된 체험활동도 하고 있다.

    이 마을은 봄에는 모심기와 창포물에 머리감기, 여름에는 미꾸라지 잡기, 가을에는 벼베기와 감자·고구마 수확, 겨울에는 김장과 전통장담그기 체험, 그리고 주남저수지 철새탐조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도시민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글·사진= 주재현 기자 power@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주재현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