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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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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藝), 그리고 만남] (3) 김종원과 정일근의 조심스런 대화

詩 와 書 직렬이 아니라 병렬이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 머문 30년
시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로 첫 만남

  • 기사입력 : 2013-10-1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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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예가 다천 김종원(왼쪽) 선생과 시인 정일근 경남대 교수가 다천의 작업실이 있는 창원시 성산구 반림동 dna 빌딩에서 만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일근 시인의 시를 김종원 선생이 해석해서 만든 서예 작품을 두 작가가 들어보이고 있다.


    문자(文字)가 앞섰을까, 시(詩)가 앞섰을까. 도식적으로는 문자가 모여 시가 되지만, 이는 시를 단순히 글자의 집합이나 나열로 보기 때문이다.

    시를 구성하는 데 있어 문자는 필수적이고, 이렇게만 따지면 문자가 분명 앞선다. 하지만 문자가 예술로 진화한 서(書)가 되면 얘기는 달라진다.

    서(書)는 자체만으로 시(詩)다.

    서는 문자의 이면(裏面)에 숨겨진 것들을 끄집어내고 재해석한다. 이에 앞서 본질적인 기능이기도 하다. 문자 하나하나를 시로 플어낼 수 있다는 것이고, 시 한줄한줄에 숨겨져 있는 것들을 해체할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문자(文字), 즉 서(書)와 시(詩)는 직렬이 아니라, 병렬인 셈이다.


    서예가 다천(茶泉) 김종원(59) 선생과 시인 정일근(55·경남대학교) 교수가 아침부터 차(茶)를 나눴다.

    서로가 같은 시간과 공간에 머물고 있음을 안 지도 벌써 30년쯤이다.

    하지만 ‘알 만큼 안다’는 묵은 분위기가 아니다. 눈빛과 목소리가 다구(茶具)에 우러나 있는 차 빛깔처럼 투명하다.

    서(書)와 시(詩)가 마주 앉은 바둑판, 한 수 한 수 서로가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다천이 먼저 돌을 놓았다.

    “지난 2011년 20년이 훨씬 넘은 시인의 작품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를 서예로 내놨다. 서예 사상 유일무이한 해석 작업이다. 시인의 작품을 선택한 것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으로, 숨어 있는 시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 그의 시에는 음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의 상황이 드러나 있었다. 분명 음악성(리듬)도 보였지만 너무 깊게 숨겨져 있었다. 숨겨진 리듬을 끄집어내기 위해 글자를 해체했다. 질서와 무질서가 혼재하는 파피루스의 모양이 됐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시가 됐다.”

    작품이 나오는 날 다천이 시인을 초대했다.

    시인은 “전율했다. 다천의 서예는 노래를 잃어가는 시에 대한 경고였다. 나에게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엄포(?)였다. 시는 시대에 대한 발언이다. 현재와 여기에 충실한 그 무엇.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는 수배(학생운동으로 인해 내려진) 생활의 척박하고 암울한 상황을 전한 것이다. 다천의 서(書)는 나의 시를 짧게 또 음악성을 가지게 했다.”

    다천이 두 번째 돌을 놓는다.

    “어떤 시가 나오나 쭉 지켜보고 있었다. 이 시대의 각박함을 해소하는 데는 서정만이 가능하다. 시인의 시에는 인간의 본성을 터치하는, 시대를 치유하는 노력이 곳곳에 보인다. 이를 서(書)로 해석해본다면 어떨까. 하지만 선뜻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마음에 드는 게 없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 어렵다. 단어 구조를 형상으로 나타내기 어려울 때 손이 안 간다. 결과물에 대한 실패의 두려움이기도 하다”고 했다.

    시인이 맞받았다.

    “옛 소련이 해체되고 6·29선언이 나오면서 투쟁의 대상이 사라졌다. 좋아했던 서정(抒情)으로 회귀했다. 서(書) 작업을 할 만한 서정과 음악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큰일이다. 격음이 점차 경음으로 바뀌고, 자연으로 가까이 가기 위해 무한 노력을 하고 있다. 오랜 역사, 신화(神話)의 아름다움을, 소리를 찾고 있다. 서(書)는 시(詩)를 해체하는데, 아직 시는 서를 표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오래지 않아 서로가 해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고 했다.

    돌 두 개씩에 벌써 목이 마른 듯, 차를 다시 나눴다.

    시인은 “지난 1988년 창원시 동면 다호리 고분에서 붓이 발견됐다는 기사를 감명 있게 읽었다. 기원전 예수가 오기 전, 붓이 있었고 사용됐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그 이후 잊고 살다 주남저수지를 오가며 다호리가 근처에 있는 것을 알았고, 그 동네에 다천이 살고 있다는 얘기 듣고 마음에 담았다. 작품도 보고 다호리고분도 지나면서 기억을 유지했다. 그러다 2010년 대학(경남대)에 온 뒤에야 만났다. 첫 인상이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본래 반듯한 서체를 좋아했지만, 정형을 탈피하고 파괴한 다천의 작품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다천은 “지난 1985년 한 신춘문예에 발표된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를 읽고, 시인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혼돈적인 상황을 실타래를 풀 듯 뽑아냈고, 그 가닥들이 현재의 시로 이어지고 있다. 시인에게 ‘상황’은 시의 원천이자 응어리다. 하지만 시인에게서 당시의 감동을 덮을 만한 시를 아직 보지 못했다. 주변 상황이 시인의 혼돈을 흐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천과 시인의 서로에 대한 충격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고, 서로는 그것이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네 번째 돌은 좀 가벼웠다.

    다천은 “서(書)는 시의 이면이다. 시가 말하지 못한 해석의 범위를 확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체라는 게 획(선)에다 문자의 의미성, 이전의 부호성을 어떻게 붓을 사용해 끄집어내는 게 관건이다. 이를 통해 시인의 숨겨진 신성(神性)을 드러내고 싶다”고 했다.

    시인은 “다천의 최근 경면주사(鏡面朱沙)를 이용한 작품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세상을 이롭게 만들고자 하는 철학을 담고 있다. 작품을 대하면 원죄(原罪)가 두렵기도 하다. 오래도록 마음에 담고도 아직 다천에 대한 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육갑(六甲)이면 쓸 수 있으려나 모를 일이다”고 했다.

    여기까지다. 서(書)와 시(詩)는 달랑 돌 네 개씩만 올려놓고 판에서 물러앉았다. 존중과 겸양의 표시다.

    바둑판을 떠난 얘기는 지역 문화로 옮겨진다.

    최근 마산역 광장에 건립돼 시비(是非)가 일었던 노산 이은상 시비(詩碑)와 관련한 속내를 나눴다.

    다천은 “지역 문화·예술이 과거에 얽매여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이원수는 친일, 이은상은 독재정권 부역의 굴레를 뒤집어 쓰고 있다. 당시의 상황은 과거다. 이를 문제로 이들의 예술세계를 논하면 안 된다. 이럴 경우 지역 예술인들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들쑤셔놓고선, 노산의 시비에 대해 지금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대화와 소통을 통해 탈출구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고 했다.

    시인은 “노산 시비 문제는 단순히 해당 사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문화의 블랙홀이 상존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마산역 광장을 오가며 시비를 볼 때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페인트를 뒤집어쓴 시비를 보면 착잡하다. 지역 문화의 현주소를 보는 듯해 안타까울 뿐이다”고 했다.

    다천은 “이 같은 사건은 무지하거나 비겁하거나 둘 중의 하나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무지나 비겁에서 벗어나 미학적인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미추(美醜)는 한 몸이다. 노산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사실 노산을 모른다. 실체적이고 실질적인 상황에서 분석해야 되는데 이를 간과한 측면이 없지 않다. 시 자체의 감동은 무한하지 않은가. 개인의 이익을 뺀다면 우리 사회가 살 만한, 뭔가 아름다운 사회 구성체가 될 것이다. 모두가 지역의 문화현상을 껍데기를 가지고 얘기한다. 본질로 가야 한다”고 했다.

    시인은 “사람들을 제대로 된 자리로 되돌리기 위한 작업이 필요하다. 정직이 그 해답이다. 정직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표출된다. 성과와 과오를 동시에 드러내고, 냉엄한 평가를 기다려야 한다. 시시비비가 없으면 사람이 아닌 작품을 보게 된다. 과거 일부의 문제라면 공(功)이 과(過)를 덮을 수 있지도 않은가. 친일과 독재는 또 다른 치열성의 문제다”고 했다.

    서(書)와 시(詩)가 머물고 있는 자리. 가야 할 길도 짚었다.

    시인은 “지역 시단은 유홍준, 박서영, 김륭, 배한봉 등이 탄탄하다. 부흥(復興)이라 해도 좋겠다. 창원이 합쳐졌다 해도 아직도 마·창·진의 울타리가 있다. 하나로 묶이기 위해 서로가 허물어져야 한다. 마·창·진 3개만 합쳐도 융합문화가 가능한데, 벽을 허물고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고 했다.

    다천은 “창원은 무한한 문화 잠재력이 있다. 붓과 제기(祭器)가 발굴된 다호리는 새로운 문화 아이콘이 되기에 충분하다. 다호리를 활용한 문화도시로의 점진적 변화를 기대하고, 이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고 했다.

    오랜만의 긴 대화. 서(書)와 시(詩)는 마지막 찻잔을 내려놓았다. “작업의 끄트머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때, 예술적 노역이 없더라도 세상이 아름다울 그때가 될 것이다”며.

    글= 이문재 기자 mjlee@knnews.co.kr

    사진= 김승권 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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