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의 시- 임성구
- 기사입력 : 2013-10-2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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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알 같은 한 줌 빛 와르르 쏟는 시월 오후
붉은 발자국 찍는 노란 구두 한 켤레가
바스락
땅 위에 시를 쓴다
태곳적 붓을 들고
폭풍이 몰아치는 얼음의 강을 지나
벌 나비 춤추던 알싸한 초원도 지나
매미가 목청을 돋우던 통증 멀리 사라진 언덕
은행나무가 줄지어 레일을 만드는 동안
불면의 밤은 또, 얼마나 깊고 깊었던가
이 가을
낙엽을 굴리며
열차는 득음에 든다
- 시집 <매화나무죽비> 중에서
☞ ‘석류알 같은’ 빛이 쏟아지는 시월입니다. 참았던 속내를 터트리는 여인처럼, 그런 심정으로 ‘땅 위에 시를’ 쓰는 낙엽들. 잎은 온몸을 던지며 일생 단 한 편의 시를 씁니다. ‘폭풍’ ‘얼음의 강’ ‘초원’ 그리고 목이 터져라 치열하게 살았던 ‘매미’들까지, 한 잎의 시 속에 다 그려져 있습니다. 어쩌면 자서전 같은 잎의 서사가 되겠지요. 어떤 낙엽은 폭우를 더 많이 기억할 것이고, 어떤 낙엽은 매미를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시들의 내용은 이렇게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이 시를 쓰는 형식은 똑같습니다. ‘태곳적 붓을 들고’ ‘땅 위에 시를’ 쓰는 형식입니다. 이 한 편 한 편의 시들이 모여서 거리에 펼쳐진 시집이 됩니다. 은행나무 시집, 느티나무 시집, 벚나무 시집…. 책장을 아무리 덮으려 해도 내용이 다 펼쳐져 있는 특이한 시집입니다. 거기서 누군가는 허무를 읽으며 걸어가고, 누군가는 생명의 의지를 읽어내고, 또 누군가는 그냥 지나치겠지요. ‘이 가을/ 낙엽을 굴리며’ 달리는 ‘열차’처럼 끝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는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다가옵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들의 운명을 ‘레일’ 삼아 달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은행나무가 줄지어’ 노란 ‘레일을 만드는 동안’ ‘불면의 밤’으로 더욱 깊어졌을 시, 그 길을 걸으며 ‘낙엽의 시’에 귀 기울이면 우리의 영혼도 한층 더 깊어지겠지요. 발바닥이 나지막이 소리 내어 읽어주는 시집, 거리에 한 페이지씩 펼쳐진 시를 읽으러 가야겠습니다. 이주언 시인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