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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사회복지 헌신 애국지사 위제하 선생

“애국지사라는 말 쑥스럽다”

  • 기사입력 : 2013-12-06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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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지사인 위제하 선생이 김해시 진영읍 아동양육복지시설 진우원에서 항일운동을 벌이던 당시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사진은 먼저 태극기를 찍은 후 위제하 선생 인터뷰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손이 멈췄다. 이쪽으로 뻗어오던 팔이 되돌아갔다. 여기저기서 받은 명함 때문에 정작 자신의 것을 찾지 못해서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거기에는 ‘위제하’라는 이름 석자가 똑똑히 박혀 있었다.

    그는 펜으로 명함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애국지사’라는 칭호를 쓱 그어내리고 그제서야 안심이라는 듯 말했다.

    “명함을 만들어 오랬더니 이름 앞에 애국지사라 적어왔더라고…. 특별히 한 일도 없는 데, 이런 말 듣기가 부끄러워 그럽니다.”


    ◆몽양 선생을 가까이서 모시다

    위제하(93) 선생은 1920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한학자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 큰 세상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서울에서 선린상업고교에 다니던 형이었다. ‘서울에 머무를 명분’을 찾던 그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 전해졌다. 중앙일보사에서 소사를 뽑는다는 공고가 난 것. 시험장에 가기 전 하느님께 기도했다. 기도가 끝난 후 눈을 뜨니 건너편 건물에 중앙일보사 편집국 팻말이 보였다. 시험을 치르는 데 이게 웬일, 마지막 문항이 ‘편집국’을 한자로 써보라는 것이었다. 모두들 쩔쩔 매고 있을 때 그는 방금 보았던 팻말을 떠올려 답을 썼고, 1등으로 합격했다. 그가 배속된 곳은 사장실. 1933년,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선생이 영어(囹圄)의 몸에서 풀려나 사장으로 취임한 무렵이었다. 손님이 내방하면 차를 끓여내고 안내하는 일을 보면서 그는 당시 조선을 이끌던 지식인들을 상당수 만나게 된다.

    ◆마음에 불을 품다

    몽양 선생과 어울리던 사람들은 김성수, 이광수, 윤석중, 최린, 최남선 등 걸출한 독립운동가와 문인들이었다. 그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 미미하지만 무궁무진한 폭발력을 지닌 열기를 감지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의 마음에 거대한 불길로 타올랐다. “이분들이 독립운동 이야기를 하더란 말이지. 상해 임시정부에 돈을 보내는 문제가 가장 큰 화두였다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마구 요동쳤지.” 몽양 선생이 들려준 후일담도 있었다. “일본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요하던 때였어. 하루는 우가키 총독이 선생을 불러다가 ‘당신이 뛰어난 연사라 들었다. 조선인들을 회유하라’고 명하더래. 몽양 선생께서 ‘독립을 달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오셨다더라고. 그때 머리와 가슴에서 불꽃이 튀었지. 나도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말이야.”

    ◆광조소년회를 결성하다

    14살 먹던 1934년 여름, 정주로 내려간 그는 30여 명의 소년들을 끌어모아 ‘광조소년회(光朝少年會)’라는 활동단체를 만들었다. ‘열혈청년론’ ‘인생독본’ 등을 읽고 토론했다. 문맹자는 글자를 익히고, 아녀자의 노고를 덜기 위해 흰색 대신 색깔 있는 옷을 입고, 음주와 도박을 삼가고, 자주독립을 쟁취하자는 4가지 사항을 기치로 내걸었다. 하지만 1940년 회원 한 명이 사복형사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광조소년회는 위기를 맞았다. 회원들이 색출되고 ‘독립운동가 활동’ 목표도 모두 들통났다. 그는 주동자로 찍혀 반 년 동안 말할 수 없는 모진 고문을 당했다.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난 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사상범이 되어 대화숙(大和塾 : 독립운동가 등 사상범들을 전향시키기 위한 사상교화단체)에 보내졌다.

    ◆사회복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다

    1945년 8월, 꿈에 그리던 광복이 찾아왔다. 그에게 대화숙에서 함께 지냈던 한설야 선생이 제의를 했다. 평양고아원의 원장으로 일해보라는 것. 그는 이듬해까지 26세라는 젊은 나이로 원장직을 성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북한의 사회사업이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는 사실에 내적 갈등을 겪다 월남을 택했다. 감리교신학대학에 진학해 공부하며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에서 빈민사업을 시작했다.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고 적십자 후원을 받아 질병을 치료했다. 이때 적십자 소속 간호사 한 명이 유독 눈에 밟혔다. 그녀는 해지고 더럽혀진 그의 옷을 빨고, 모래가 그득한 쌀을 곱게 일어 밥을 했다. 그녀로부터 ‘천사 다음은 당신’이라는 찬사도 들었다. 그녀가 바로 지금의 아내 조용화 여사다.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을 만큼 부호의 딸이었던 그녀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곁으로 왔다. 1949년 결혼 후 아내는 60여 년 동안 계속된 사회복지사업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다.

    ◆진우원을 맡아 현재에 이르기까지

    1963년 6월 지인의 권유로 진우원 원장 자리를 맡게 된다. 사라호 태풍으로 무너진 고아원의 새로운 터를 찾아다니다 정착한 곳이 김해시 진영읍이다. 그는 전화선과 전기를 끌어오고 허허벌판에 꽃과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한때 100명이 넘던 원생은 현재 30명 선으로 줄었다. 하지만 이상적 복지를 향한 그의 꿈은 여전하다. “현대적 아동시설을 갖추고 싶었어요. 칸칸이 나눠진 수용소 같은 곳이 아니라 가정집처럼 편안한, 시카고의 헐 하우스(hull house)처럼, 경남에서 최고 가는 시설로 가꾸고 싶었어.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오.”

    ◆죽을 고비를 거푸 넘기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어요. 1943년 10월 6일 도쿄에서 대성중학에 다닐 적이었어. 학도병 모집을 피하려고 5일 밤에 시모노세키 항에서 배를 타기로 했어요. 그런데 친구가 하룻밤만 머물다 가라길래 그러기로 했지. 다음 날 배가 현해탄에서 격침당했다는 소식이 들렸어. 아찔했지. 두 번째 생사의 갈림길은 1950년 한국전쟁 때 한강철교 밑에 천막교회를 세우고 빈민들과 함께 지낼 때였어. 군인들이 들이닥쳐 위협하길래 ‘빈민들을 위해 일할 뿐인데 왜 죽이느냐’고 했더니 한 군인이 주기도문을 외워보랍디다. 그래서 두 손을 든 채 주기도문을 줄줄 외우지 않았겠어. 그랬더니 그냥 가더라고.”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오게 한 특별한 소명이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되고 있다고 믿는다. 2010년 건국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지난해 경남도 민간복지 대상을 받았다. 시대의 격랑을 유연하게 타고 넘으며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 온 결과다.

    “부지깽이였지. 보잘것없지만 불을 피우려면 부지깽이가 꼭 있어야잖아. 한가운데서 활활 타오르는 걸 바란 게 아니야. 그러니 애국지사라는 말은 참 쑥스러운 말이야!”


    글= 김유경 기자·사진= 성승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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