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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77) 김승강 시인이 찾은 고성 포교

바다가 물러서며 나를 이끈 곳, 저마다 간직한 마음속 오지
동쪽 언덕바지에 하얀 교회 십자가
일제히 남쪽을 바라보고 선 집

  • 기사입력 : 2013-12-2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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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군의 남쪽 끝마을인 삼산면 두포리 포교마을.
    포교마을 인근 미룡리서 만난 교회의 하얀 십자가.
    택지 개발이 한창인 포교마을.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가자 설국이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 중에서

    언덕을 넘어가자 마을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교회의 하얀 십자가였다. 교회는 마을 동쪽의 언덕바지에 붉은 벽돌로 지어져 남서쪽을 바라보고 우뚝 서 있었다. 마을의 집들은 일제히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 앞으로는 동서로 77번 국도가 지나갔다. 나는 마을을 서쪽에서 들어갔는데 고개를 넘자마자 교회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 교회가 고개를 넘어가면 바로 시선이 가는 방향, 그러니까 남서쪽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얀 십자가 아래로는 건물의 세로 방향으로 교회의 이름이 네 글자로 박혀 있었다. 글씨는 흰색이었는데 붉은 벽돌색과 대비를 이루면서 시선을 당겼다. 나는 마을로 들어서면서 교회의 위치가 참 절묘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초행길이었고 따라서 모든 풍경이 새로웠는데, 77번 국도를 타고가다 그 마을을 스쳐 지나가지 않고 그 마을이 바라보고 있는 남쪽으로 발길을 옮겨놓게 된 것은 어쩌면 그 마을이 내게 준 그런 첫인상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첫인상의 팔할은 물론 그 교회와 그 교회의 하얀 십자가였다.

    마을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들판이 나오고 들판 아래로 한 시 방향에 바다가 들어와 있었다. 들판에는 한 줄기 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은 초행자인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길이 있으면 인적이 있어야 하는데 어딜 둘러보아도 인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길은 예상 외로 폭이 넓었다. 길 끝에서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겨울이었고 떠돌이 바람이 들판을 지배했다. 한참 내려가자 길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왼쪽 길은 작은 다리를 건너 산을 넘어갔고 오른쪽 길은 한 시 방향의 바다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오른쪽 길을 택했다. 바다로 다가가자 바다는 뒤로 물러나면서 나를 안내했다. 바다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자 마을이 나타났다. 바다는 나를 마을로 안내한 뒤 강처럼 휘돌아 내해로 빠져나갔다. 몇 개의 언덕과 몇 개의 마을을 지나 나는 다시 갈림길에 섰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왼쪽 길은 처음 들판에서 갈라졌던 그 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다시 말해 왼쪽 길을 택하면 마치 올가미처럼 돌아 처음의 갈림길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오른쪽 길을 택했고 그 길은 나를 어딘가로 인도했다. 그 길 끝에서 포교를 만났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의 일이다.

    오늘날 진정한 의미의 오지는 없다. 오지는 무엇보다 접근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접근의 어려움은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그곳의 자연생태에 동화하게 한다. 따라서 오지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이 자연생태로부터 멀리 떠나와 있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자연생태적 삶의 결핍은 우리에게 오지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 인공위성이 지상을 낱낱이 내려다보고 있는 오늘날 오지는 접근성만으로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이제 오지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고향 같은 것, 이미 남아 있지 않은 최후의 보루 같은 것,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내 마음의 오지’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오지에 대한 향수를 달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오지는 아닐지 몰라도 우리는 여행을 통해 순간순간 ‘내 마음의 오지’를 찾고 발견하기를 원한다. 나는 ‘내 마음의 오지’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형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소설 ‘설국’이 그리고 있듯, 좁은 입구를 지나 어두운 통로를 한참 들어가다 그 끝에서 시선이 확 트이면서 넓은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나에게는 ‘내 마음의 오지’가 몇 군데 있는데 포교가 그중에 하나다.

    포교는 고성읍에서 서남쪽으로 16㎞ 떨어진 지점에 있는, 삼면이 바다(자란만)로 둘러싸인 해안마을이다. 아까 고개를 넘자 마주쳤다는 교회가 있는 곳은 포교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삼산면 면소재지인 미룡리로, 77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삼천포와 고성읍 중간 지점쯤에 위치해 있다. 마을 중간이 두 동강 난 것 같은 형세로 동남으로 길게 뻗어 마치 베를 깔아 놓은 형상과 같다 하여 베 포(布)자와 다리 교(橋)자를 따서 포교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래는 버드래, 눅개, 모래치, 매땀, 박골, 와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눅개, 모래치, 박골, 매땀이 덕산으로 편입되고, 그 뒤 와도가 따로 떨어져나가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포교를 다시 찾았다. ‘내 마음의 오지’ 포교를 보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삼산면 미룡리의 그 교회도 보고 싶었다. 또 미룡리의 그 교회가 내려다보고 있는 바다로 가는 길목의 그 들판도 보고 싶었다. 나는 당시 포교를 처음 알게 된 뒤 삼 일이나 사 일에 한 번씩 미룡리를 거쳐 포교를 들고나다녔는데, 그때마다 예의 그 떠돌이 바람이 지배하는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로 난 길을 지나갔고 지날 때마다 이탈리아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가 만든 흑백영화 ‘길(La Strada)’을 떠올리고는 했다. 나는 영화에서 그렇듯 길 위에서 안소니 퀸(Anthony Quinn)이 분한 방랑 차력사 잠파노와, 그 영화로 여성 채플린이란 별명을 얻은 줄리에타 마시나(Giulietta Masina)가 분한 젤소미나를 생각했다. 아마 그 들판의 거칠고 정처 없는 떠돌이 바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부러 삼천포 쪽에서 77번 국도를 타고 고성읍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그때처럼 언덕을 넘자 바로 내 시선으로 들어왔던 미룡리의 그 교회의 하얀 십자가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내 마음의 오지’가 있듯이 ‘슬픈 예배당’이 몇 군데 있다. 삼산면 미룡리의 그 교회는 예배당이라고 하기에는 덩치가 좀 컸지만 내 마음속의 ‘슬픈 예배당’ 중에 하나다. 내 마음속의 ‘슬픈 예배당’은 모두 ‘내 마음의 오지’에서 또는 그것으로 가는 도중에 만났다.

    우선 자동차를 대포마을에 세우고 자전거로 갈아탔다. 마을들은 해안선을 따라 낸 도로로 연결돼 있었다. 나는 해안선을 따라 페달을 밟아 매땀을 거쳐 덕산마을의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덕산마을 고갯마루는 아까 말한 두 번째 갈림길이 있는 곳으로 오른쪽 길이 포교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나는 16년 전 그때와 달리 왼쪽 길을 택했다. 자전거를 타고 포교를 들어갔다 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았다. 동행이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자전거로 올가미 모양을 그리며 돌면서 마을들을 둘러본 뒤 포교는 동행과 함께 자동차로 마지막으로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덕산에서 두모 마을로 이어지는 가파른 해안선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포교마을로의 접근을 돕기 위해 도로를 넓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전에는 그 가파른 해안선은 포교로의 접근을 어렵게 했을 것이다. 포교로 가는 길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은 포교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포교마을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발 아래로 바다가 확 열린다. 우선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숨을 한 번 골라야 하는데, 숨을 고르면서 내려다보는 자란만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눈부셨다. 그러나 포교마을 입구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내리막길은 달랐다. 좁았던 내리막길이 확장공사로 많이 넓어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변화의 조짐은 여러 군데서 발견됐다. 우선 마을 앞 방파제 끝에 선 빨간색 페인트의 구조물이 낯설었다. 동네 사람에게 물어보니 얼마 전에 만든 등대라고 했다. 또 마을 남쪽 해안가 쪽의 산이 마구 파헤쳐져 있었다. 그 산에는 오래된 수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별장단지가 들어설 택지를 개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 마음의 오지’는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포교마을을 돌아 나오면서 동행과 나는 ‘오지는 없다’는 말에 공감했다.

    나는 지금 고메즈(V. Gomez)의 클래식기타 연주곡 ‘슬픈 예배당’을 듣고 있다. 어릴 때 세례를 받은 아내는 신은 자신을 버렸고 그래서 신을 못 믿는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이 밤 나는 내 마음속의 ‘슬픈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올려다보며 기도한다. “그대여, 그 세상에서는 부디 무병하고 평안하시길….”

    글·사진= 김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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