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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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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김태선(필명)- 랩타임

  • 기사입력 : 2014-01-02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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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킷은 한산했다. 차창을 열자 아침공기가 얼굴을 스친다. 영상 14도, 좋은 온도다. 수온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 패독에 대기 중인 자동차들이 눈에 들어온다. 메인 컨트롤 타워에서 표를 끊고 시계를 보니 주행을 준비할 수 있는 약간의 여유가 있다. 타이어 공기압을 한 번 더 체크하며 시합 날 아내 현주가 응원석에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운전석 버킷시트에 앉아 4점식 벨트의 버클을 채운다. 양쪽 어깨에서 내려온 벨트의 끈을 잡아당기자 엉덩이와 척추가 시트에 딱 달라붙는다. 시트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는 기분이 드는 순간 맥박이 조금 빨라진다. 벨트가 맞물리는 소리는 의식을 전환시키는 신호탄과도 같다. ‘딸깍’ 소리와 동시에 낙하산을 메고 산과 하늘을 배경으로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 된다. 자동 반사처럼 되풀이되는 영상이다. 시동을 걸자 카랑카랑한 엔진과 중저음 머플러 소리가 혈관을 타고 돌기 시작한다. 약간의 흥분, 팽팽한 긴장감이 차 안을 채운다. 계기판의 주황색 불빛을 보며 욕심 부리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힘주어 말한다. 깊은 호흡을 한다.

    몇몇 경주차들이 출발대기선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패독을 빠져나와 출발대기선으로 이동한다. 이제 30분 동안 350마력 트윈터보와 나는 한 몸이 될 것이다. 초록 깃발이 올라간다. 일렬로 대기 중이던 경주용 차들이 차례로 요란한 머플러 음을 내며 세상의 공기를 한꺼번에 깨트릴 듯 달려 나간다. 귀를 찢는 듯한 소리는, 나를 괴롭히고 억압하고 짓누르고 구태의연하게 만들고 의심하며 조롱하던 모든 것들을 뚫어버린다. 끝까지 가보는 것, 망설이지 않는 것, 유유히 내려오던 낙하산은 독수리의 날개를 얻고 날개 뒤의 배경은 사라진다.



    귀가 아프다. 누군가 커다란 주삿바늘을 귀에 넣어 뇌 속을 찔러대는 것 같은 통증이 머리를 짓누른다. 깊은 물속에서 시작된 소용돌이가 나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몸이 진흙덩어리처럼 느껴졌다. 눈꺼풀이 무겁다.

    ‘여기가 어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날카로운 통증은 슬며시 사라졌다. 눈을 떠보니 차창 밖으로 검푸른 하늘이 보인다. 먼 데 불빛이 낯설다. 글러브를 벗고 내 손등과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천천히 4점식 벨트를 풀고 헬멧을 벗어 옆 좌석에 놓고 비좁은 공간에서 몸을 약간 구부려 다리를 만져본다. 차문을 열어보니 순순히 열린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생소한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온다. 인기척이 없다. 간격을 두고 서 있는 가로등만 희미한 여명 속에서 빛난다. 낯선 장소다.

    차를 한 바퀴 돌면서 충돌 부분을 살펴본다. 뒤 펜더가 움푹 들어가 있다. 엔진 쪽이 아니라 다행이군. 이 차를 탐탁지 않아 하던 아내가 보면 뭐라 할까. 손목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10분 12초에 멈추어 있다. 어둑한 하늘과 새벽 공기는 멈춘 시각에 걸맞지 않았다. 머릿속이 웅웅거리며 무거웠지만 생각을 해야만 했다. 휴일이었고, 나는 오전 10시에 출발대기선에 있었다. 출발신호를 알리는 초록깃발이 올라갈 때 엑셀을 힘껏 밟았다. 서킷에서 사고가 났다면 몇 분 안에 처리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가로등 불빛을 따라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걸었다. 직선코스가 활주로처럼 펼쳐져 있다. 서킷은 분명한데 내가 있던 용인은 아니다. 밤새 운전한 기억도 없다. 차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확장된 코스는 내가 경험한 서킷이 아니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잔디밭에 주저앉아 한동안 꼼짝 않고 있었다.

    아침 해가 뜨면서 하늘이 점점 밝아지고 주변이 확대되어 눈에 들어왔다. 200m 전방에 작고 단순한 건물이 햇빛을 반사했다. ‘저곳이 메인 컨트롤 타워일 거야.’ 잔디에서 일어나 건물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누군가 나에게 다가온다. 걸을 때마다 스커트 자락이 팔랑거린다. “아직 이른 시간이에요.” 십대로 보이는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거리낌 없이 말했다. 막 떠오른 가느다란 햇살이 소녀의 이마에 붉은 빛을 비춘다. 반듯한 이마다.

    누구냐고 물었다. “이소예요.” 그녀는 나를 가볍게 훑어보더니 “아저씬 영화 세트장에서 튀어나온 것 같군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몸을 약간 틀어서 손가락으로 연둣빛 건물을 가리키며 나에게 따라 오라고 했다. 이상하게 들릴 줄은 알지만 이곳이 어딘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스피드웨이요. 세트장은 당연히 아니죠.” 나는 여기가 순식간에 이렇게 변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삼 년째 일하고 있는데 그동안 변한 것이라고는 별로 없어요. 아주 따분한 걸요. 건물에 페인트를 다시 칠하거나, 레인을 보수한 것 정도죠. 그리고 전 아이가 아니에요.” 까무잡잡한 얼굴과 개구쟁이 같은 눈웃음 때문에 십대 소녀를 대하듯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태도가 쑥스러워졌다.

    그녀는 앞서서 연둣빛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걷는 모습이 빙판 위에서 빙그르르 도는 스케이트 선수의 몸짓처럼 가벼워 보였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금세 앞서 갔다. 따라잡기 위해 다급한 목소리로 “저…….”하며 우물거리자, 그녀는 앞서 걷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뒤처져 있는 내 얼굴을 응시하며 한 글자씩 힘주어 “전 이? 소? 예요.” 라고 말했다. “음, 이소.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졌어. 서킷의 형태나 주변 풍경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군.” 갈라져 나오는 내 목소리에 이소는 엷은 미소를 띠며 따라오라고 눈짓한다.

    건물은 단순했다. 사과를 반으로 잘라 붙여 놓은 듯한 반원의 박스가 유리문에 붙어 있다. 손가락을 대자 금빛 뚜껑이 움직이며 열렸다. 몇 개의 단추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단추를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참기 어려운 갈증 때문에 마른 침을 삼켰다. “잠깐이면 돼요.”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간결한 실내다. 어떤 도구든 벽 속으로 숨어 있어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할 수 없는 그런 공간이다. 이소의 얼굴 뒤쪽으로 스크린만이 선명히 보였다. 스크린에는 자연 풍광이 계속 펼쳐지고 있고, 스피커에서 피아노의 경쾌한 선율이 흐른다. 이소는 커다란 스크린이 있는 벽 뒤쪽에서 물과 알약 두 알을 가져다 건네준다. 물어볼 겨를도 없이 알약을 입 안으로 털어 넣고 물을 들이켰다.

    갈증이 가시자 버린 듯 세워두고 온 차에 마음이 쓰였다. 차가 있는 곳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장소다. 코스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고, 마치 외부의 벽을 뚫고 들어와 있는 듯한 각도로 서킷을 마주보며 정지해 있었다. 나는 분명 오전 10시에 스타트라인을 출발하여, 여덟 번째 랩을 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새벽을 지나 아침이 되어가고 있다. 만일 지금이 다음 날 아침이라면, 20시간 정도가 내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다. 스무 시간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일까? 왜 아무 기억이 없을까? 아내를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해지면서 조바심이 났다.



    다음 주 일요일 경기에 올 수 있는지 아내에게 물었을 때 “난 당신이 차에 몰두하는 걸 이해할 수 없어.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돈을 차에 쓰고 있어.”라며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괜한 말을 꺼냈다. 새 차를 구입하면서 함께 드라이브하는 것을 상상했다. ‘한적한 국도로 빠져나가 우리가 자주 가던 국숫집에 들르면 좋아할까? 아내가 마음에 들어 할 곳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군.’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러나 아내는 차에 냉담했다. 심지어 화가 나면 하이힐로 조수석 쪽 문을 탕탕 때렸다. 어떻게 조수석에서 다리가 그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이는지 불가사의했다. 아내가 그럴 때마다 내가 얻어맞는 기분이 되었다. 차를 질투할 수도 있나? 하지만 그런 마음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어떤 말을 듣게 될지 두려웠다. 아내의 마음을 얻는 것이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나는 늘 종종거리며 그녀를 따라가기 바빴다. 차로 인해 우리 관계가 좋아질 거라 생각한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아내는 어떤 부분에서 나보다 나에 대해 더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나를 위해 차를 구입한 것이 진실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된 것도 아내의 이런 태도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레이싱을 할 의도는 없었다. 쿠페를 타면서부터 점점 차에 관심이 깊어지게 되었고, 아내는 그럴수록 차뿐만 아니라 나에게서도 멀어졌다. 게다가 나는 지금 알 수 없는 장소에 와 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오늘이 무슨 요일일까? 일요일에 서킷에 왔고 지금은 아침이다. 만일 오늘이 월요일이라면 어서 출근을 서둘러야 한다. 창경궁 도우미들의 교육이 잡혀 있고 전통문화 행사에 참가하는 팀 대표들과 미팅도 있다. 만일 화요일이라면, 상황은 나쁘지 않다. 화요일은 내가 교대로 쉬는 날 중의 하루니까.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내는 “당신이 직장인인지, 남편인지, 아니면 이십대 청년인지 생각 좀 해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 이상한 혼란이 어서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기분이 훨씬 좋아졌죠?” 이소가 투명한 물 컵을 가져가며 물었다. 알약을 먹고 나서 아내 생각, 출근 생각을 하는 중에 두통과 목마름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도 가벼워졌고 정신 또한 맑아졌다. 사태를 파악하느라 나아진 몸 상태를 미처 자각하지 못했을 뿐, 서킷을 단숨에 질주할 수 있을 것처럼 가뿐하고도 특별한 기분이 되었다.

    나를 보는 이소의 입술 양끝이 올라가며 얼굴이 환해졌다. 이소에게 고통을 호소한 적이 없었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다시 돌아가는 것에 대해 골몰했다.

    이소는 의자를 당겨 내 앞에 앉는다. 팔을 가볍게 움직여 리모컨을 들어 단추를 누른다. 스크린에서 펼쳐지고 있던 멋진 풍경이 사라지고 미소년 같은 기자가 주유소를 배경으로 말하고 있다. 기자 뒤로 푸른색 간판의 주유소 정경이 보인다. 지나다니는 차들이 예사롭지 않다.

    “세계 최초의 주유소는 1905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시에 세워진 오토모빌휘발유 주식회사였습니다. 이때의 주유 방법은 휘발유 탱크에 호스를 넣고 입으로 빨아내어 급유하는 원시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점점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가 줄어 현재는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머지않아 마지막 주유소가 문을 닫을 것에 대비해 정유회사들은 기존의 주유소를 대폭 줄이고…….”

    마지막 주유소라는 말에 시간이 왜곡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화석연료라면 휘발유나 경유를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러고 보니 스크린의 영상도 고도로 입체적이다. 화면 속의 주유소에서 물방울처럼 매끈한 자동차가 내 앞으로 곧 튀어나올 것만 같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이소에게 오늘 날짜를 물었다. “아저씨의 시간은 아저씨가 머물던 장소와 함께 있어요.” 어렵게 얘기하지 말고 시간을 알려 달라고 하자 “이미 알아차리셨을 테지만 아저씨의 시공간과 이곳은 차원이 다른 곳이에요. 그러니 아저씨가 묻는 시간에 대해 제가 말해 준다는 건 어렵기도 하고 별 의미도 없어요.”라면서 이소는 내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냉정해야 한다. 분명히 오늘 난 용인에 있었다. 출발선에서 힘껏 엑셀을 밟았다. 뒤 펜더가 움푹 들어갈 만큼의 사고가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새로운 장소와 시간 속에 와 있다. 아내와 부모님을 생각했다. 친구들과 직장 동료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결혼식장의 하객처럼 순서 없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소중한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먼 곳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다시는 그들에게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집중했다.

    정신이 들어 시간을 봤을 때 손목시계는 멈추어 있었다. 이는 시간의 뒤틀림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차에 장착된 시계를 확인해보면 상황을 좀 더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차의 시계가 멈추지만 않았다면.

    턱을 만져보니 수염은 아직 자라지 않았다. 배도 고프지 않다. 정신을 잃었던 시간을 분명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한두 시간 이내 또는 그것보다는 더 잠깐일 것이 분명하다. 서둘러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오늘 안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다면 출근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아내가 걱정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곳에 더 머문다면 예측하지 못한 무엇과 맞닥트릴지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은 계획에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여러 가지로 고마웠고, 어서 가봐야겠다고 했더니 이소가 빙긋이 웃는다. 나의 시간을 전부 이소가 갖고 있는 것처럼 여유 있는 미소다. 이소가 재빨리 그러나 흐트러지지 않은 태도로 나를 훑어본다. 그리고 내 시계에 눈길을 멈춘다. “아저씨, 시계를 잠깐만 주시겠어요?” 이소는 현미경처럼 생긴 기계장치에 조심스레 시계를 내려놓고는 간단한 조작을 했다. 가느다란 녹색 광선을 몇 번인가 시계에 쏘았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정교한 조작이다. “다시 올 때 필요할 거예요.” 이소의 검고 큰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인형 같이 짙은 속눈썹이 깜박인다.

    나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돌려받은 시계를 착용하면서 이소가 왜 친절한지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서둘러 차가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밖으로 나오니 서킷의 전경이 환히 눈에 들어왔다. 밝을 때 보니 처음 보았을 때보다 훨씬 넓었고, 직선코스 또한 비행기가 이륙할 수 있을 정도로 끝이 안 보였다.

    나는 6번 코너에서 이탈했었다. 욕심이 과했다. 튜닝 샵인 챌린저클럽에 들러 접지력 좋은 브랜드 타이어로 갈아주면 1초는 단축할 자신이 있었다. 비록 아마추어 경기지만 우승을 하면 대개 스폰서가 생긴다. 스폰서에 따라서 출전 차량까지도 지원받을 수 있으니 돈 안 들이고 경기할 수 있고, 아내에게 자랑도 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왔다. 관람석에 종종 클럽 주인의 여자 친구 수지가 상기된 얼굴로 서 있는 것을 볼 때면, 나도 그 자리에 아내가 있는 것을 상상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포근해졌다. 수지처럼 나를 응원해 줄까? 내가 우승을 하면 정말 놀랄 거야.

    아내는 스스로 미인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난 첫눈에 반했다. 쉽게 말 걸기 어려운 타입임에도 이상하게 끌렸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친절할 때면 인생은 작고 단순해졌다. 안타까운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발생할 때였다. 아내는 우리가 했던 말과 상황을 정확히 기억했다. 머리 모양이나 옷처럼 사소한 것뿐 아니라 둘의 관계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그런 순간들 말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해 대충 얼버무려도 금세 눈치 챘다. 그러면 공기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관계다. 나라는 인간이 그에 걸맞기를 바란다. 내가 차의 작은 부분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과 비슷하다. 차에 손질이 필요할 때 정비하지 않으면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을 경험하면서 아내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감성도 ‘머신’ 이상으로 섬세하기 때문이다. 레이싱을 하며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한발 다가섰다고 생각했지만, 아내는 내가 서킷에 다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레이싱이 우리 관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나도 모르는 장소에서 아내에게 가기 위해 조바심을 내고 있다.


    차는 벽을 부수고 들어온 것처럼 서킷의 직선구간을 바라보며 외곽 잔디밭 위에 얌전히 정지해 있다. 벽이 처참하게 허물어진 것도 아니고 차가 마구 훼손되어 있지도 않은데 차의 방향은 외벽으로부터 금방 튀어나온 것 같은 모양새다. 차 문을 열고 시트에 몸이 닿자 알 수 없는 안도감이 생겨났다. 시동을 켜본다. 엔진음을 들으니 출발대기선에 서 있는 기분이 된다. 헬멧을 쓰고 벨트를 맨다. ‘딸깍’하는 소리가 경쾌하다. 그 소리가 몸의 기억을 더욱 분명하게 해주었다.

    여덟 번째 랩이었다. 5번 코너를 막 탈출하니 투스카니와 거리는 채 1m도 되지 않는다. 5번 코너를 지나서 6번 코너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코스는 약간의 내리막이라 코너에 도달하기 직전 100㎞/h 이내로 감속해야만 코너를 매끄럽게 탈출할 수 있다. 투스카니가 먼저 6번 코너의 안쪽을 잽싸게 차지한다. 헤어핀에 도달하기 전 짧은 직선구간에서 녀석을 추월해야 한다. 나는 3단으로 시프트다운하면서 녀석보다 바깥쪽으로 돌아 추월하려 했지만 평소보다 약 10㎞/h 정도 오버스피드로 코너에 진입하는 바람에 브레이킹 포인트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타이어가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끼이익’ 하는 스키드음을 내더니 뒷바퀴가 코너 바깥쪽으로 미끄러지면서 방향을 잃고 말았다. 카운터를 쳐도 이미 늦었다. 코스를 이탈해서 인코너 쪽 안전지대 잔디밭 위로 올라섰다. 잔디 위에선 브레이크가 듣지 않았다. 감속되지 않은 채로 나는 가드레일을 향해 눈썰매처럼 미끄러졌다. 핸들 조작으로 간신히 오른쪽으로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태풍이 남해에 상륙하기 직전 일본 쪽으로 방향을 틀 듯이. 하지만 태풍의 끝자락만 스쳐도 상황은 심각하다. 운전석 뒤 펜더 부분이 가드레일에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먼 곳의 천둥소리처럼 아득히 들렸다. 순간이 터널같이 길다. 터널 끝에는 지구의 끝, 새로운 장소가 버티고 있다. 사방이 깜깜했다. 잔디밭 위를 30m쯤 미끄러진 후 간신히 멈췄다.

    기억은 분명하다. 사고 지점에서 시간이 왜곡되어 버린 것이다. 문제는 나의 세계로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들어온 길을 모르니 나가는 길도 알 수 없다. 이제 잠시 후면 속속 선수들이 올 것이다. 이곳 역시 레이싱 경기장이므로. 왠지 그들이 오기 전에 서둘러 여기를 떠나야만 할 것 같았다. 성급히 차로 왔지만 나는 출구를 모른다.

    이소에게서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이소에게 가려니 친구의 친절을 큰소리치며 거절해 놓고, 다시 애원하는 꼴이 된 것 같았다. 이소가 나를 잡은 것도 아닌데 마구 뿌리치고 도망 온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소는 친절했다. 하지만 불쑥 튀어나온 나의 존재가 이상하지 않았을까? 새벽녘에 엉뚱한 장소에 있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이소는 분명히 내 처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건물의 문은 닫혀 있다. 앞으로 다가서자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시계에 뭔가를 새겨 넣었던 것이 작동되는 것이겠지. 출입권이라고 했으니까.’ 피아노 선율이 물방울을 튕겨내듯 공기를 진동시키고 있다. 내가 들어가자 이소는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방긋 미소 짓는다. 점점 빨라지는 피아노 선율 사이를 지나 나는 그녀에게 다가섰다.

    이소가 내 표정을 읽었을까? “궁금한 게 뭐죠? 아저씨는 제게 자신을 소개하지도 않았어요.” 그랬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겨를이 없었다. 뒤늦게, 이제야 난 한정민이며 문화재청 소속 공무원으로 창경궁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나도 모르게 이곳에 오게 되었으며, 그건 알 수 없는 사고였다고 해명하듯 말했다.

    그녀는 천천히 명료한 목소리로 물었다.

    “돌아가고 싶으세요? 아저씬 현실에 만족했나요? 창경궁에서 무엇을 생각했죠? 아저씬 이곳을 간절히 원했어요.”

    “누구나 현재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며 살지는 않을 거야. 아마도. 그것이 곧 불행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 테고. 난 서른두 살이야. 음, 그러니까 이제야 조금은 독립적으로 무언가를 계획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 서킷을 질주하는 것이 내가 원하던 것이라 하더라도 이 장소에서는 의미가 없어.”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아저씬 이곳을 간절히 원했어요.”라는 말이 가슴속에 쿡 박혔다. 지금까지 그런 말을 했던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보존되어 있는 창경궁은 내가 선택한 곳이다. 숭문당에서 책을 넘기고, 함인정에서 시를 읊는 정취에 머물던 시간에 몰입하는 것이 현재를 풍부하게 한다고 믿었다. 스스로 선택한 직업이면서도 나의 마음 어느 구석에서는 지지부진한 일상이라고 생각했고 거기에 함몰되고 싶지 않아서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정물화 같은 일상과 내가 따라갈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같은 아내, 서킷에서 경주하다보면 그 모든 복잡한 감정은 사라졌다.

    그래도 나는 돌아가고 싶다. 가족도, 아내도, 집도, 일도, 이곳에는 없다. 그러므로 이곳에는 나, 한정민이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있지만 그것만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곧 내가 없는 장소다. 숨어 있던 나, 내가 원했던 또 다른 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도 지금으로서는 내가 아니다. 내가 선택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소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요. 결국 아저씨의 문제죠. 아저씨가 돌아가기 원한다면 그쪽 시간에 맞추어야 해요. 시간과 장소가 어긋나버리면 다시 돌아가기 힘들어져요. 아저씨의 시간으로 이곳에서 두 시간 이상 머물면 안 되거든요.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아저씨의 차로 돌아가서 차가 놓여 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후진하세요. 30m 뒤쪽에서 출발 신호를 받을 때처럼 가속하세요.” 이상했다. 차 뒤는 곧바로 벽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는 시늉을 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벽은 실제가 아니에요. 걱정하지 말고 무조건 후진을 하세요. 그리고 아저씨의 세계로 돌아가면 이걸 삼키세요. 고통을 덜어줄 거예요.” 아까 먹었던 알약을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잔디밭에서 30m쯤 미끄러지다 “꽝!”하는 소리와 함께 겨우 멈추었다. 사고 순간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잠깐 동안 의식의 백지상태를 거쳐, 사고처리반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드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차를 천천히 안전지대로 이동시켰다. 내가 경험했던 시공간은 흔적도 없고, 나는 5월 3일 10시 10분으로 돌아왔다. 눈에 익은 풍경을 보자 안심이 되면서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아내에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말을 누가 믿어 주겠는가. ‘내 말을 누가 믿어주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집을 나온 소년 같은 기분이 되었다.

    혜화역에서 내려 창경궁을 향해 걷는다. 늘 타던 지하철, 늘 걷던 출근길이다. 예전의 나는 어떤 기분으로 이 길을 걸었는지 기억해 보았다. 어제가 아득히 멀었다. 5년 동안 출근했던 익숙한 길에 서 있는 나는 마치 흑백영화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 되었다. 지하철 정거장에서 햇살이 눈부신 지상으로, 지상에서 지하로 드나드는 군중 속에 내가 있다. 군중들 사이로 꽃잎처럼 선명히 떠오르는 얼굴, 환한 얼굴이다. 빙판 위에서 핑그르르 원을 그리면서 이소가 나타났다. 군중들은 일시에 무색해졌다. 군중들과 나는 한 무더기로 칠해진 어두운 배경이 되었다.

    회색배경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출근을 한 나는 종일 가슴이 답답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사람이 내려도, 닫힌 문에 잘린 향수 냄새는 남는다. 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잘라져 나온 알 수 없는 꼬리 한 자락을 쥐고 있는 기분이 되었다. 익숙한 일상에 의심이 생겼다. 점심을 먹고 나니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오른손이 무심코 와이셔츠 주머니 쪽으로 간다.

    꺼림칙한 것을 떨치듯 산책을 했다. 함인정 앞에 이르자 문득 이소가 한 말이 떠오른다. “아저씨가 원했던 두 시간이 있어요.” 눈을 들어 현판을 바라본다.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봄물이 사방에 가득하다는 시구다. 좋아하는 구절이다. 사시(四時)를 노래한 오언 고시가 사면의 현판에 새겨 있지만 봄의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봄의 풍경과 춘당지에 가득 차 있는 잔잔한 물과 마르지 않고 흐르는 금천의 풍광이 머릿속에서 연속적으로 지나갔다. 봄비가 내려 연녹색 물이 오른 봄 나무와 연둣빛 건물이 한 무리로 엉켰다. 물방울을 튕겨내는 듯한 모짜르트의 선율 사이로 이소가 미끄러지듯 걸어와서 환하게 웃는다. ‘춘수만사택’ 이 시구는 미래의 창경궁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소가 고개를 들고 이 구절을 본다.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머신을 타고 질주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꿈은 아닌 거야.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본다. 아내가 생일 선물로 사 주었다. 아내는 단순한 모양의 가죽 끈이 있는 것을 권했지만, 나는 타키미터 기능이 있는 스포츠시계를 골랐다. “경주를 할 때 이 버튼을 누르면 돼. 자동차 경주에서 랩타임을 잴 때 사용할 수 있지.” 나는 아내에게 기능을 설명해 주었다. 이소는 이 시계에 무엇을 한 것일까? 돌아오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안절부절이다. 뫼비우스의 띠 양쪽에 아내와 이소가 있고, 나는 머신을 타고 띠 위를 질주한다. 이런 상상은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영화의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 길을 잃어버린 내가 관객의 시선에서 벗어난 채 헤매는 기분이다. “아저씨가 원하던 장소예요.”라는 말이 귀를 간지럽힌다.



    “여보 저녁 먹자구.” 나는 건성으로 “응, 저녁.” 하고 대답했다. “당신 정말 이상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몇 번씩 말해도 못 알아듣네. 걱정 있어요?” 아내가 나의 눈을 들여다보려 하자 나는 식탁의 밥그릇에 시선을 두며 다음 주에 있을 시합 때문에 긴장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엔 여러모로 완벽하게 준비했다. 지난번에 2위를 하고 곧바로 첼린저클럽으로 갔다. 우승하면 좀 더 여유롭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우승하고 나면 다음 목표를 설정하고 더욱 질주하게 될 것이다. 왜 진작 프로에 입문하지 않았을까 하며 후회할지도 모른다. 한 번 맛본 승리감을 이어가기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일 것이다.

    고개를 들어 아내를 보니 쓸쓸해 보인다. 아내의 얼굴을 아주 오랜만에 본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끝내 아내의 기분을 배려하지 못하는 인간일까? 나는 그저 차가 좋고 코너를 느끼는 게 좋다. 측면의 중력감은 고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건 견뎌야 하는 것이지만 막상 속도가 올라가면 새로운 감정으로 채워진다. 차와 내가 하나가 되고 내 팔은 핸들이 된다. 가속할 때의 통쾌한 엔진 소리는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내 안의 에너지를 뽑아 올린다. 세상의 모든 혼란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침대에서 책이 뚝 떨어진다. 아내는 늘 머리맡에 몇 권의 책을 둔다. 잠들기 전에 책을 읽는 것이 아내의 습관이다. 스티븐 호킹의 ‘호두껍질 속의 우주’라는 책을 방바닥에서 집어 든다. “호두껍질이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야. 딱딱한 것은 껍데기거든.” 아내의 말이 떠오른다. 이 책은 몇 달 전부터 침대 이쪽저쪽 자리를 옮겨 다니고 있다. 늘 무심하게 보아왔는데 문득 호기심이 생긴다. 별들이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다가 깜빡 졸았다. 아내가 커다란 방망이로 호두를 깨고 있다. 벌어진 호두껍데기 속에서 이소가 춤추는 인형이 되어 빙글빙글 돌고 있다. 피아노 소리가 넓게 퍼진다. 터키행진곡이다. 이소의 발은 작았다. 하얀 맨발이다. 작은 발을 딛고 불쑥 튀어나와 내 손바닥 위로 올라올 것만 같아 멈칫 놀라는데, 음악소리는 점점 사그라진다. 정적 속에서 이소는 은반 위를 지치듯 유유히 돈다. 검고 짙은 나일론 속눈썹과 플라스틱 눈꺼풀이 깜빡인다.



    아내는 도서관으로 출근을 했다. 서킷에 다니기 전에는 내가 쉬는 휴일엔 아내의 도서관에 찾아가 함께 점심을 먹고 마당을 걸으며 커피를 마시고 돌아오곤 했다. 서킷에 다닌 이후로 휴일은 체력을 단련하고 레이싱 연습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이전 같으면 오늘도 서킷에 갔을 테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자꾸 이소의 목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아저씨가 꿈꾸던 차가 있어요. 아저씨가 원하던 장소죠.” 새로운 고통이다. 아내에게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기분, 그리고 내가 원하던 차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이 내 양 다리에 추를 매단 것처럼 나를 잡고 늘어졌다.

    어차피 휴일에는 늘 서킷에 갔었다. 시합도 얼마 남지 않았다. 평소대로 하면 된다. 굳이 지금 서킷에 가지 않을 이유는 없다. 이소가 있던 장소나 머신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어쩌면 몽상일 수도 있다. 내가 그곳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증명할 무엇도 없고,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일을 혼자 고민하는 꼴이다.

    점심을 먹고 챌린저클럽에 들르기로 했던 일정도 접고 곧장 용인으로 갔다. 막상 시동을 걸고 나니 마음이 급해졌다. 연습을 위해 간다고 내 자신에게 말하면서도 어느새 새로운 장소의 입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6번 코너에서 이탈하는 곳에 문이 있을까? 하지만 거긴 다른 차들도 종종 이탈하곤 했던 곳이다.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마치 약속 장소에 늦기라도 한 것처럼. 귓전에서 터키행진곡의 곡조가 점점 빨라졌고, 내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초록 깃발이 흔들렸고, 엑셀을 밟았다. 6번 코너에 진입할 때 잔뜩 긴장을 하고 지난번과 같은 속도를 염두에 두고 돌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사고도 나지 않았다. 두 번째 랩을 돌면서 다시 6번 코너에서 일부러 회전각을 바꾸어 잔디 위로 올라갔다. 어느 정도 미끄러졌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차철환 선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서둘러 출발대기소로 돌아오면서 맥이 풀렸다. 자판기에서 블랙커피를 뽑아 마시며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관람석으로 올라가서 다른 차들이 주행을 마칠 때까지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실제로 이소의 공간이 존재했었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감이 생겨났다. 화요일에 서킷을 다녀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서킷에서의 시도가 무산되고나자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그럴수록 현실감이 점점 줄어들고 이소가 있던 장소는 더욱 아득해졌다. 점심을 먹고 차를 주차해둔 곳으로 가서 찌그러진 뒷 펜더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나는 펜더를 고치지 않고 있다. 당분간은 수리하지 않을 것이다. 시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5월의 햇살은 점점 눈이 부셨다. 창경궁에는 단체로 소풍을 오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아침부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화판을 펼치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가족 나들이 모습, 아이들, 연인들,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진촬영을 하는 예비 신혼부부들. 왕궁은 격조 있는 소풍공간으로 봄의 기지개를 펴고 있다. 카메라를 고정해 두고 다정해 보이는 남녀가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한다.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어 머리 위로 헤어밴드처럼 올린다.

    퇴근할 때 안경점에 들어가 유브이 프로텍트(uv protect)라는 라벨이 붙은 선글라스를 하나 골랐다. 선글라스를 쓰고 시계를 보자 마치 야광체가 내는 빛처럼 타키미터의 베젤 네 곳에서 녹색점이 빛나고 있다. 형광처리를 한 것 같았다. 세 곳의 점은 각각 10시, 10분, 12초를, 나머지 하나는 시속 110㎞를 의미한다. 6번 코너에서 사고를 냈을 때의 시각과 속도다. 바로 이것이 이소가 말한 출입증일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선글라스를 제자리에 놓았다. 10시 10분 12초에 시속 110㎞로 6번 코너에 진입할 것. 시간과 속도와의 싸움에 익숙해진 나로서는 기술적으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귀를 관통하는 통증과 두통 증상을 느끼며 정신이 들자 다른 세계로 들어오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다. 밖은 새벽 어스름에 싸여 있고 가로등만 존재감이 있었다. 벨트를 풀고 문을 열고 나와 차를 한 바퀴 둘러보니 이번엔 가드레일을 들이받지 않고 제대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시계는 10시 10분 12초에서 정확히 멈추어 있다. 전처럼 이소가 걸어오고 있다. 오랜 친구처럼 정다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두통 때문에 자꾸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녀를 따라 연둣빛 건물로가 알약 2알을 삼켰다.

    “다시 올 줄 알았어요.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아저씨는 통행권의 사용방법을 알아냈고요. 이곳에 계속 머물 작정이라면 마음껏 속도를 즐길 수 있지만, 다시 돌아갈 생각이라면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아요. 아저씨의 시간으로 이곳에서 두 시간을 보낼 수 있어요.”

    그건 늘 내가 원했던 시간이다. 말하자면 하루에 두 시간이 더 있다면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다. 두 시간이라니.

    차는 굉장했다. 내가 도저히 만져볼 수 없는 수준이다. 일반차량으로 환산하면 1500마력이 넘으니 초슈퍼카인 셈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차를 준다 해도 운전할 수 없어요. 일부 애호가들만 즐기죠. 전자장비 도움으로 운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머신의 기본 메커니즘과 인간 감각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다룰 수가 있어요.”

    이소는 반짝이는 키를 내손에 쥐어 준다. 출발을 잘 할 수 있을지, 긴장과 기대가 교차된다. 양쪽 어깨와 차체가 거의 닿는다. 두 다리도 누에고치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기분이다. 겨우 두 다리를 밀어 넣고 클러치, 브레이크, 가속페달 위치를 확인했다. 가속페달을 밟는 순간 ‘쿠구궁 에에엥’ 포뮬러1 특유의 엔진음이 터져 나온다. 속도를 좀 올려도 페달은 돌덩이처럼 무겁다. 감각이 확장되어 노면의 촉감이 그대로 발바닥에 전달된다. 살짝 건드려도 튕겨나갈 자세가 되어 있는 질주본능으로만 뭉친 존재다. 속도와 나는 일체가 되었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다.



    나는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처럼 기분이 들떴다. 그리고 그 비밀이 힘겨웠다. 아내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사실로 인해 외톨이가 된 것 같았다. 남들과 공유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 나의 세계에서 어떤 의미일까? 그건 그저 꿈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그곳의 두 시간에서 얻는 에너지로 이곳에서 24시간을 지탱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장소에 그만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눈앞에서 이소가 방긋 웃었다. 나는 새로운 장소에서의 두 시간을 잘 지켰다. 하지만 점점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 힘겹게 느껴졌다. 그건 나에게 새로운 선택을 강요하는 것으로 작용했다. 지난번에는 겨우 돌아왔고 그러면서 그 세계 속에 갇히는 공포감을 느껴야만 했다. 이소가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이소는 나에게 원하는 것이 없었다. 나는 어리석게도 그런 것들을 차분히 생각해 보지 못했다. 생각하기 싫었다. 그저 두 시간의 완벽한 질주를 위해서 이소의 미소를 의심하지 않으면서 현실의 24시간을 살아냈다. 내 손목에는 그곳에 언제든 갈 수 있는 통행증이 채워져 있다.

    “여보, 시계를 왜 그렇게 골똘히 쳐다보고 있는 거야? 당신 안색이 안 좋아. 기분 전환할 겸 이번 주말엔 영화라도 보러 갈까?” 주말엔 서킷에 가야할 것 같다고 했다. “당신, 요즘 서킷에 너무 자주 가는 거 알아? 이번 주는 그냥 나랑 지내봐. 어차피 시합도 지나갔잖아. 다음번에 시합 나가면 그땐 꼭 응원 갈게. 취미로 하는 건데 너무 신경을 쓰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잖아.”

    팝콘 봉지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처럼, 버터냄새로 가득 채워진 로비에서 두 장의 표를 끊었다. 영화 속에서는 자신의 신체 성분 일부를 도둑맞은 남자가 정체불명의 회사를 상대로 신체적 소유권에 대한 권리와 보상을 요구하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싸움이 계속될수록 이 남자의 신체는 점점 뒤틀리거나 마모되어 갔다. 그러면 회사에서는 그 남자에게 더 정교하고 멋진 인공 신체를 팔았다, 남자의 외모는 점점 완벽해졌고, 완벽한 외모를 만들기 위해서 지불된 채무는 점점 늘어갔다. 남자는 그 돈을 갚기 위해 죽도록 일하면서, 자신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계속했다.

    영화관을 나와서 아내는 “저 남자는 어디서 멈추어야 할까?”라고 간단히 말했다. 마치 나에게 묻는 것 같다. “당신은 언제쯤 두 시간의 집착에서 벗어날 거야?”라고 말이다. 새로운 장소에 대해 말하면 믿어줄까? 현실에서 충족시킬 수 없는 질주본능을 이해해 줄까? 이곳에서 채우지 못하고 있는 뭔가를 찾아서 자꾸 그곳으로 가게 된다면 아내는 그만 멈추어야 한다고 내게 말할까? 아마도 그렇게 말하겠지.

    “여기, 이곳에서 두 시간을 갖고 싶어.”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내는 이상하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우리 옆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확인하고서 미소를 지었다. “꼭 어린아이처럼 말하네. 좀 더 있다가 집에 가자는 거지? 그래도 두 시간은 너무 길어. 아이스크림은 달콤하긴 하지만 금방 먹는걸.”


    아내와 주말을 보내고 와서 그 주 내내, 점심을 먹고 나면 춘당지로 향했다. 춘당지의 물을 바라보며 나는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그때마다 손에 땀이 나 축축해졌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바지에 손바닥을 쓱쓱 문지르며 사무실로 돌아오곤 했다. 밤마다 연못의 물을 빼고, 온 연못 바닥을 훑고 있는 꿈에 시달렸다. 번번이 땀에 젖은 상태로 꿈에서 깨어났다. 창경궁의 시간에 안주하던 나는 속도를 혐오한 인간이었는데, 100분의 1초에 연연하는 내가 되어 있었다. 책상 서랍에서 아내가 시계를 담아 주었던 상자를 꺼냈다. 얇은 종이를 넉넉히 넣고 그 안에 시계를 가지런히 놓았다. 사람들이 퇴근하고 어둑해질 무렵 작은 사다리 하나를 들고 함인정으로 갔다. ‘춘수만사택’이 적힌 현판 안쪽으로 시계 상자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당선 소감 -  "글 통해 세상과, 나 자신과 소통"

    김태선 씨

    폭우가 쏟아지던 여름날, 도로변에 넘치는 물을 가르며 차가 다가와 제 앞에 섰습니다.

    미처 하수구로 빠져나가지 못한 붉은 물이 차도와 인도의 간격을 없애버리고 차창에 퍼붓는 빗물을 와이퍼가 밀어내기도 전에 빗줄기가 앞을 가리던 날이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고 당선소감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내내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빗속을 뚫고 카페에 가서 얼마나 열심히 소설을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언니, 함께 열심히 할 사람이 필요해요’라고 제게 말했던 승린과 아트센터와 도서관을 전전하다 골목과 시내에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 카페로 발길을 돌렸던 것이 몇 년 전입니다. 비가 퍼붓던 그날, 어쩌면 종일 그 친구와 소설에 대한 이야기만 하다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돌아왔을지도 모릅니다. 이러다 계속 습작생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울한 생각이 들 때면, 소설을 쓰지 않는 나를 상상해보곤 했습니다. 소설을 쓰지 않는 나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희망도 절망도 없는 나였습니다. 계속 실패를 쌓아가더라도 소설을 써야 할 것 같았고, 그것도 받아들여야 할 소설의 분신 중 하나라는 것을 인정할 때, 경남신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경남신문과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글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내 자신과 소통하는 방법을 익히며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소설을 알게 해주신 이원섭 선생님, 작가의 참모습을 보여주신 이순원 선생님, 소설과 대면하게 해주신 박상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혼자 가기 어려운 이 길을 함께해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고 싶은 문우 승린 씨에게 말로 부족한 고마움을 전합니다. 언제나 나를 믿고 지지해준 친구들과 동생들, 조용히 기다려준 남편과 아들 고맙다.

    ●1963년 인천 출생 ●2002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주)엘엔아이소프트 개발실 근무




     



    심사평 - 현실에 갇히지 않은 상상력

    예심을 넘어온 작품들은 문장이 일정 수준에 도달했고 소설의 디테일과 형식도 성실하게 갖추었지만 대부분 소재가 현실에 매몰된 채 답답하게 전개되어 별 사건 없이 예상되는 결말에 이르는 점이 아쉬웠다. 무엇보다 인물들이 소설에서 문제적 인간으로 살아나지 못해 공감력이 약했다. 소설은 정답을 충족시키며 공식에 맞는 결말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현실과 소설 방식과 이미 나온 답을 비켜가고 넘어서며 독창적인 전환을 모색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 중 <랩타임>, <이콘을 찾아서>, <마우솔레움>을 관심 있게 읽었다. <마우솔레움>은 고독사한 사람들의 사후(死後) 처리 일을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이슈가 된 것들을 소재로 해서 쓴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의성도 있고, 이야기 자체의 매력도 있었지만, 같은 소재의 소설이 이미 나온 적이 있다는 점, 이들과 비교하여 크게 새로운 점이 없었다는 것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이콘을 찾아서>는 일종의 여로형 소설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진행되는 이야기 위에 회상을 통해 제시되는 과거의 사건들을 포개 놓았다. 문장이 매끄럽고 구성이 탄탄하며 소설적인 완성도도 높은 편이었지만, 이미 익숙하게 보아 온 여로형 소설의 패턴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도 주었다.

    당선작으로 뽑힌 <랩타임>은 다른 작품과는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다. 시간이 고색창연하게 고여 있는 창경궁에서 근무하는 아마추어 카레이서를 주인공으로 한 이 작품은 서로를 짜 맞추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압박을 받는 신혼부부의 갈등과, 경주 차와 손목시계를 매개체로 두 종류의 시간을 오가며 다른 차원에서 오롯하게 자기 시간을 경험하는 주인공의 내면적 드라마를 감각적으로 그려냈다. 소설의 기본을 충족시키면서도 현실에 갇히지 않은 시원한 상상력으로 소재를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충격을 통해서 독자가 단지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경험하게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차가운 중성적인 문체가 이 인물과 잘 어울리며 매개체를 사용한 입체적인 구성력과 소설의 내면을 떠받치고 있는 시적인 힘이 조금 약해지는 뒷부분의 결함을 잡아주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전한다.

    <심사위원 전경린·정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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